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700여년간 보관하고 있는 경남 합천군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스님이 경판을 든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부처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진 대장경(부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 목판이다. 원래 명칭은 고려대장경인데, 경판의 수가 8만 1258판에 이르기 때문에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완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에 기록돼 있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다 1318년 강화도 선원사로 옮겨졌다. 팔만대장경이 해인사 장경판전으로 봉안된 것은 1398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7년 5월 10일의 기록에는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대장경을 이송할 때 2000명의 군사가 동원됐으며, 스님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고, 의장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고 한다.
세계 유일의 목판 보관용 건물인 국보 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연합뉴스
해인사 장경판전은 두 개의 긴 중심 건물 사이에 작은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장식적 의장이 적어 간결, 소박한데, 이는 경판 보관 기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건물 내부를 단순하면서도 과학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경판전 벽면과 건물 앞뒷면에 있는 붙박이창의 위치와 크기를 서로 달리해 자연적으로 통풍이 되고 온도가 유지되도록 했다. 또한, 바닥에는 땅을 깊숙이 파서 숯, 찰흙, 모래, 소금 등을 넣어 비가 많이 와서 습기가 차면 바닥이 습기를 흡수하고, 가뭄이 들면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와 자동적으로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대장경이 온전하게 보관된 것도 이러한 과학적이고 지혜로운 설계 덕분이라 할 것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지만, 조선이 보유한 팔만대장경은 당대에 가장 정확하고 가치 있는 불경으로서 다른 이웃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은 사신을 수시로 보내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요청했고, 심지어 대장경판 자체를 넘겨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대장경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밀당’ 외교는 조선 태조 때부터 13대 임금인 명종 때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총 83차례에 걸쳐 팔만대장경의 판본과 목판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 당시 대장경 사본 43점이 일본에 전달됐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6년 1월 2일자에는 일본 사신단이 대장경판을 얻지 못하자 단식농성을 벌인 일도 기록돼 있다. 성종 시절에는 더위 질병에 효험이 있는 일본의 후추 씨와 대장경을 교환하는 일이 거론되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인 중요성과 고유성, 그리고 대체 불가능성을 인정받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또한 이보다 앞서 지난 1995년에는 해인사 장경판전이 건축물로서 빼어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해인사는 두 개의 유네스코 유산을 보유한 사찰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