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필리핀 케손 시티에서 태어난 카트리나 할릴리는 2003년 오디션 프로그램인 ‘스타스트럭’을 통해 모델이 되었다. 섹시한 이미지로 각광받았던 할릴리는 대표적인 남성 잡지인 ‘FHM’의 필리핀 판을 대표하는 이미지였고 이 잡지는 2년 연속(2006~07년) 할릴리를 ‘가장 섹시한 필리핀 여성’으로 선정하기도 했으며 네 번이나 커버 걸로 다루었다. 배우로도 활동한 할릴리는 TV 드라마에서 주로 악녀 캐릭터를 맡으며 유명해졌고, 영화 ‘원 나잇 온리’(2008)부터는 주인공 자리에 올랐다.
카트리나 할릴리
승승장구하던 할릴리의 탄탄대로에 제동이 걸린 건 2009년이었다. 섹스 비디오 파문이 터졌는데 상대는 헤이든 코였다. 1980년생인 그는 성형외과 의사이자 2007년부터는 배우로 활동했던 셀러브리티. 연인인 비키 벨로는 그보다 무려 24살 연상이었는데, 피부과 의사로서 ‘비키 메디컬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헤이든도 함께 안티 에이징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알코올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던 헤이든은 2006~2007년에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고, 섹스 장면을 몰래 카메라에 담아 왔던 것. 필리핀 여성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그 대상이었으며, 그중 할릴리도 있었다. 할릴리는 당시 ‘비키 메디컬 그룹’의 모델 중 한 명. 헤이든의 연인인 비키의 일을 도우며 알게 된 할릴리와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피해 여성 중 할릴리가 유일하게 법적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영화 감독이었다”며 자신의 동의 없이 촬영과 동영상 유포가 이뤄진 것에 대한 보상과 헤이든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데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치권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 대통령 비서실장인 에두아르도 에르미타는 “공중도덕을 해치는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며 피해 여성들은 모두 고소를 하라고 강권했다. 의회에선 상원의원인 봉 레빌라가 앞장섰다. 배우 출신인 그는 안티 포르노 법안을 추진 중이었던 보수파로 음란물에 대한 강한 제재를 촉구했다. 그는 할릴리를 대동하고 직접 경찰청에 가 신고를 했는데, 이때 기자들 앞에 나서 자신이 포르노의 유통을 막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급기야 헤이든과 할릴리가 참석한 상원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의사협회는 헤이든의 면허를 취소했다.
헤이든 코와 비키 벨로
정치인들은 “할릴리는 홀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모든 필리핀인들은 성폭력과 성추행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재판에서 할릴리는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한다. 헤이든의 절친인 에릭 추아가 200만 페소(약 4000만 원)를 주고 동영상을 입수해 불법 동영상 유통으로 악명 높은 로렌스 티우에게 넘긴 정황이 있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죄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 헤이든의 어머니인 아이린은 할릴리가 자기 아들을 마약의 세계로 끌어들였다며 공격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명예훼손죄만 성립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두 사람에게, 특히 할릴리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마무리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사회적 도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무 것도 제대로 해결된 건 없었다. 애매해진 건 비키였다. 그녀는 아들뻘인 어린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인 헤이든과 홍보 모델이었던 할릴리, 두 명 모두에게 배신당한 셈이었다. 결국 그녀는 헤이든과 결별했고 할릴리와의 관계도 끊어졌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화해 사진
할릴리도 고통을 딛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2012년 R&B 가수인 크리스 로렌스와 사귀면서 딸을 낳았고, TV 드라마에서도 꾸준히 활동을 펼쳤다. 예전보다 순위가 내려가긴 했지만 여전히 ‘FHM’의 섹시 스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15년에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탤런트 에이전트인 로리트 솔리스의 주선으로 카트리나 할릴리와 헤이든 코와 비키 벨로, 세 명이 화해의 자리를 가진 것.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세 사람은 지난 애증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이든은 할릴리에게 용서를 빌었고, 할릴리도 벨로에게 미안함을 표시했으며 벨로 역시 할릴리에게 “너는 나에게 딸 같은 존재였다”는 말로 용서를 전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2009년의 사건이 이제야 종결되었음을 대중에게 알렸고, 이로서 필리핀 연예계의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