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이후 ‘시간통일’이 이뤄지며 재계의 기대감은 더욱 치솟았다. 시간통일이 원활한 남북경협을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북한은 5월 5일부터 한국보다 30분 느렸던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로 바꾸기로 했다. 남북 정상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자 재계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과거 중소기업 위주로 진행됐던 경협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대기업들도 바빠졌다. 경협의 첫 단계로 진행될 에너지와 통신 네트워크 등 SOC(사회간접자본) 인프라 확충에 대기업들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디저트 ‘민족의 봄’을 개봉 후 박수치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기업들은 대외적으로 전국경제인연합과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경협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대한상의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이번 정상회담 만찬에 경제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했기에 경협의 ‘민간 컨트롤타워’로 발돋움할 것이란 평가도 받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들이 전경련보다 대한상의를 통해 대북사업을 준비하는 분위기“라며 ”대기업 위주로 이뤄진 전경련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위축된 반면, 대한상의는 중소기업까지 아우르기 때문에 경협에 더욱 적합하다는 평가”라고 말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10·4선언이 언급되자 당시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에 동행했던 재벌그룹 총수들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2007년 방북단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방북단에 포함됐다. 방북단에 포함됐던 한 기업 관계자는 “이전에 관심을 보이고 대북사업을 진행했던 기업에 우선순위가 돌아갈 것”이라며 “아직 청와대에서 직접적인 시그널을 보내지는 않았으나 저마다 기대를 안고 대기하면서 치열한 눈치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대북사업의 주도 기업으로 알려진 현대그룹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의 독점사업권을 가진 사업권자로서 남북경협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개발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경협이 확대될 경우 대규모 투자가 필요산 대북사업에 다른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재계에서는 SOC 분야를 담당하는 계열사들을 여럿 둔 SK그룹과 LG그룹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그룹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을 맡고, 철도 도로 사업을 공기업이 맡을 경우 에너지와 통신 부문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SK와 LG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얘기다.
SK는 에너지와 화학을 담당하는 SK이노베이션과 친환경에너지를 담당하는 SK E&S, 석유와 가스 사업을 진행하는 SK에너지와 SK가스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특히 통신 서비스를 담당하는 SK텔레콤은 2002년 북한 조선정보기술산업총회사와 합작해 중국에 IT회사 설립과 북한 CDMA망 구축 등을 추진한 바 있다. 또 SK경제연구소는 2005년 자원개발사업과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에 따른 수송관 등 대북사업을 연구한 바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경협과 관련해 SK가 중요하게 거론되는 얘기는 들은 적 없다”며 “북미정상회담과 유엔 대북제재 해제 등의 이슈가 남아 있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잡거나 내용을 언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 대북사업은 위험 요소가 많아 대기업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가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며 ”하지만 섣부르게 대외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LG그룹은 화학부문(LG화학)과 통신서비스 부문(LG유플러스)에 노하우를 갖고 있다. LG그룹이 주력사업으로 진행 중인 신재생에너지 사업은 북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재생에너지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정부가 경기도 파주 장단면 일대에 ‘제2의 개성공단’ 조성을 검토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LG의 역할론이 더욱 부상하고 있다. 파주 인근에 LG디스플레이와 LG화학, LG이노텍 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LG그룹이 파주에 보유한 인프라를 활용해 ‘제2의 개성공단’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관측을 보이고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실제로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며 “에너지 화학 분야에서 다른 기업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관광 등 다수 대북사업은 이미 현대그룹이 추진해왔기에 남북경협에서 LG그룹의 역할이 클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통신사업에서는 KT도 기대를 걸고 있다. KT는 2002년 민영화된 공기업으로 국가기간산업인 통신망 사업자의 역할을 해오며 필수설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지난 27일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주관통신사로 선정돼 방송망과 전용회선 등 통신 시스템 및 시설을 구축한 바 있다. KT는 대외협력 조직 내 대북사업 지원 조직을 꾸리고 내부적으로 전략 수립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재계 1위 삼성은 남북경협에 투입될 만한 뚜렷한 사업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국가기간산업을 영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들은 SOC분야와 다소 거리가 멀다. 그나마 철도관리사업을 하는 삼성엔지니어링이 주목받고 있으나 이마저도 갈 길이 멀다. 오경석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다른 건설주들은 남북경협 수혜주로 분류되며 그동안 저평가받았던 것이 해소됐으나 삼성엔지니어링은 플랜트 건설 등을 주력으로 하기 때문에 남북경협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남북 훈풍에 시중은행 ‘북한 지점’ 재진출 모색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시중은행들은 북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 북한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 은행들은 ‘북한 지점’ 재가동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북미회담과 유엔 제재 등의 이슈가 남아 있어 여전히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이고 있다. 2004년 개성공단에 입점해 영업했던 우리은행은 부서별로 대북사업에 재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은행은 2007년 금융업계 최초로 개성공단 진출 중소기업 지원 전용상품인 ‘개성공단 V론’을 출시한 바 있으며,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시 임시환전소를 설치해 운영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과거 대북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만큼 협력단계에 따라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개성지점 재입점 추진은 물론,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시 조기정상화를 위한 특별금융지원 등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KEB하나은행(옛 외환은행)은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에 진출한 바 있다. 외환은행 시절인 1997년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에 금호출장소를 내고 경수로 사업 관련 금융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KEB하나은행은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아직 경협 내용이 구체화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획은 없다”며 “개성공단이 재가동될 경우에도 과거 지점을 운영했던 은행들의 재입점이 우선되고 이후 순차적으로 다른 은행들이 움직일 것 같다”고 말했다. 2006~2009년 금강산관광특구 내 금강산지점을 운영한 NH농협은행은 북한지점 재진출 기대감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농협은행은 이 같은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우리 은행이 과거 금강산지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대북 진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다소 이른 감이 있다”며 “중앙회 차원에서 논의가 진행돼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