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O 리그에선 ‘소방수’다운 소방수를 거의 보기 어렵다. 잠잠하던 마운드에 8회 이후 갑자기 불이 붙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불을 끄러 올라왔다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센 불을 번지게 해놓고 내려가는 투수들도 많다. 어렵게 중책을 맡긴 마무리 투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감독들의 시름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치고 역전패하는 기분은 아예 초반부터 승기를 내줬을 때보다 더 참담하다. 그래서 각 팀 소방수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어렵다.
# 1이닝 소방수의 기원, 라 루사와 에커슬리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은 초창기 프로야구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펜 투수는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한 선수들이 밀려나 어쩔 수 없이 맡게 되는 자리로 여겨졌고, 따로 역할 구분 없이 상황에 따라 필요한 투수들이 나가 경기를 책임지는 방식을 진행됐다. 선발 투수가 잘 던지면 투구 수에 관계없이 무조건 경기 끝까지 책임지게 하는 일도 허다했다. 이런 분위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야구 역사 전문가인 빌 제임스는 당시 워싱턴 소속으로 뛰었던 퍼포 마머리라는 투수가 최초로 현대 마무리 투수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꼽는다. 마머리는 선발승이 세이브보다 많았던 투수다. 마머리가 마무리 투수의 개념을 정립했다면, 1930년대 뉴욕 양키스 투수 조니 머피는 전문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최초의 선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머피가 고정적으로 경기 마지막에 등판하기 시작하면서 성공 사례를 남기자 194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각 팀에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마침내 ‘세이브’라는 기록이 탄생했고, 1969년부터는 메이저리그가 세이브를 공식 타이틀로 집계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마무리 투수가 중요한 투수 보직의 하나로 공인된 것이다.
데니스 에커슬리. 사진 출처 = MLB.com 동영상 캡쳐
물론 당시의 마무리 투수들은 1이닝이 아닌 2~3이닝을 던지는 일이 잦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980년대 후반까지는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최초로 ‘1이닝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선수가 나타났다. 데니스 에커슬리다. 그는 1975년 클리블랜드에서 데뷔한 뒤 보스턴과 시카고 컵스를 거치면서 선발 투수로 165승을 올렸다. 하지만 오클랜드로 이적한 1987시즌엔 선발로 두 경기에 나섰다가 “구위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 오클랜드 사령탑이던 토니 라 루사 감독이 그에게 “그렇다면 마지막 1이닝만 책임져 달라”고 했다.
한 이닝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 있게 된 에커슬리는 그해 16세이브를 올린 뒤 1988년부터 아예 1이닝만 던지는 마무리 투수로 정착해 무려 45세이브를 올렸다. 1992시즌엔 51세이브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라 루사 감독은 에커슬리의 성공 이후 아예 선발-필승 계투조-마무리 투수로 이어지는 투수 기용 시스템을 구축했다. 메이저리그의 투수 운용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고, 경기력이 크게 향상된 시기다. 에커슬리는 은퇴 후 1이닝 마무리 투수로는 사상 최초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 이광환 감독이 정착시킨 투수 분업화
한국 프로야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투수 분업화가 제대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2년 구원 1위에 오른 황규봉부터 2002년 구원왕인 조용준까지 스물한 명의 투수 가운데 1997년 이상훈(85⅓이닝)과 2000년 진필중(73이닝)을 제외한 열아홉 명이 그해 100이닝을 넘게 던졌다. 특히 황규봉은 무려 222⅓이닝을 소화했고, 1985년 권영호가 174⅔이닝, 1986년 김용수가 178이닝, 1992년 송진우가 191⅓이닝을 각각 기록했을 정도다. 선동열이나 구대성 같은 명투수들조차 1990년대 중반까지 마무리 투수로서 투구 이닝을 관리 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선동열은 5~6회에 등판해 9회까지 던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구대성 역시 구원 1위에 올랐던 1996년에 139이닝을 던져 18승 24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한국 야구에 가장 먼저 ‘투수 분업화’를 도입한 인물은 이광환 전 LG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감독은 세인트루이스가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 후반, OB 구단의 경비 지원을 받아 현지에서 코치 연수를 했다. 앞서 언급한 라 루사 감독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신만의 투수 운용 방식을 정착시켰을 무렵이다. 당시 깊은 인상을 받은 이 감독은 1992년 LG 감독으로 부임한 뒤 비슷한 방식으로 마운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부 야구 관계자들은 “이광환 감독이 이끌던 LG가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로 한국 투수들의 평균 수명이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감독은 4일 휴식을 보장하는 선발 투수 5인 로테이션을 활용한 것은 물론이고, 불펜을 승리조와 패전조, 롱릴리프와 원포인트릴리프, 1이닝 마무리 투수로 철저하게 구분해 운영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라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방식을 따르지 않는 팀이 욕을 먹는다.
2017 KBO리그 LG 대 삼성 경기에 앞서 이광환 LG 전 감독이 시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KBO 리그의 구원 투수 시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국은 2003년까지 세이브가 아닌 ‘세이브포인트(세이브+구원승)’를 기준으로 구원왕을 정했다. 마무리 투수들이 세이브 상황과 관계없이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 워낙 많으니, 세이브와 구원승을 모두 포함하는 게 구원 투수들의 가치 판단에 적합하다고 여겨서다. 그러나 점점 마무리 투수들의 역할이 세분화되면서 ‘구원승’은 소방수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2004년부터는 오직 세이브만으로 구원왕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구원왕 선정 제도 개편 이후 첫 수상자는 2004년 36세이브를 올린 임창용이었다.
# 달라진 위상, 사라진 특급 마무리
마무리 투수는 잘 알려진 대로 압박감이 크고 외로운 자리다. 세이브와 홀드는 기록 성립 조건이 동일하지만, 확실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같은 상황에 등판해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모든 불펜 투수에게 고루 주어지는 홀드와 달리, 세이브는 그 경기를 끝낸 단 한 명의 투수에게만 주어진다. 홀드는 팀이 역전을 당하거나 패배를 해도 자신이 리드를 지켜내기만 하면 사라지지 않지만, 마무리 투수에게는 ‘다음’이 없다.
그만큼 마무리 투수의 위상도 예전보다 높아진 게 사실이다. 1992년 에커슬리가 구원 투수 최초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003년엔 에릭 가니에가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뉴욕 양키스에서 은퇴한 전설적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는 현역 시절 무려 1500만 달러(약 168억 원)라는 연봉을 받았다. LA 다저스 마무리 투수 켄리 잰슨은 지난해 5년 8000만 달러(연 평균 1600만 달러)에 사인했다. 한국에서도 롯데 손승락이 넥센에서 뛰던 2013년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4년 40세이브를 올린 정명원 이후 19년 만에 나온 마무리 투수 출신 수상자였다. SK 마무리 투수였던 정우람은 2016 시즌을 앞두고 한화로 이적하면서 4년 총액 84억 원을 받았다. 역대 투수 FA 전체 몸값에서도 5위 안에 드는 금액이었다. 무조건 ‘선발이 최고’라는 시대는 지났다는 의미다.
연합뉴스
선발과 불펜을 전천후로 소화했던 선 감독은 마무리 투수로 시즌을 치른 1993년 31세이브를 올리면서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했다. 1995년에도 33세이브, 평균자책점 0.49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냈다. “불펜에 선동열이 몸을 풀면 상대 팀은 이미 추격 의지를 잃었다”는 일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이 일부러 (기용할 생각이 없는) 선동열을 불펜에 내보내 몸을 푸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할 만도 했다. 오승환 역시 47세이브를 올린 2006년 평균자책점이 1.59에 불과했고, 2007년 역시 40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40으로 위력을 보였다. 2011년에는 47세이브를 올리면서 평균자책점 0.63으로 시즌을 마쳤다. 한국에선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고의 소방수였다. KBO 리그 9년 통산 평균자책점이 1.69다.
요즘은 다르다. 2015년 구원왕 임창용(당시 삼성·현 KIA)이 33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83, 2016년 구원왕 김세현(당시 넥센·현 KIA)이 3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60, 지난해 구원왕 손승락이 3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18로 각각 타이틀을 가져갔다. 물론 2점대 평균자책점에 ‘부진’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다만 경기 마지막 이닝, 그것도 3점 차 이내 상황에서 등판하는 마무리 투수 특성상 ‘압도적’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올 시즌에는 3점대, 혹은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는 마무리 투수도 적지 않다. 벌써 부진이 거듭돼 2군에 다녀오거나 아예 팔꿈치 수술로 시즌을 마감한 소방수도 나왔다.
# 시즌 도중 소방수 교체의 어려움
따라서 일부 팀은 시즌 도중 마무리 투수를 바꾸는 모험을 단행하기도 한다. 성공 사례도 수차례 나왔다. 오승환이 대표적이다. 오승환은 2005년 삼성에 신인으로 입단해 불펜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당시 마무리 투수는 팀 선배 권오준이었다. 하지만 시즌 중반 권오준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선동열 당시 감독이 둘의 보직을 바꿨다. 권오준 셋업맨-오승환 마무리 콤비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KO 펀치’라 불리며 상대 팀을 KO시켰고, 삼성은 향후 6년간 마무리 투수 걱정 없이 시즌을 치렀다. 오승환은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인 2016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세인트루이스는 기존 마무리 트레버 로젠탈이 시즌 중반 계속 부진하자 셋업맨이던 오승환을 소방수 자리에 앉혔다. 오승환은 무사히 시즌 마지막까지 소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분명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중간에서는 잘 던지다가도 ‘마무리 투수’라는 감투를 쓰자마자 부담을 느껴 흔들리는 투수들이 많아서다. 마무리 투수들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는 일반 불펜 투수들보다 훨씬 높다. 경험이 없는 젊은 투수들에게는 벅찬 경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부 감독은 특정 선수를 마무리처럼 기용하면서도 “네가 우리 팀 마무리 투수다”라고 못 박지 않는 심리적 요법을 쓰기도 한다. 불펜에서 가장 구위가 좋은 왼손과 오른손 투수를 한 명씩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마무리로 기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더블 스토퍼’ 체제다. 물론 역시 최선의 방법은 확실한 마무리 투수 한 명이 뒷문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행운인지 요즘 여러 구단 감독이 실감하고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3년간 556억원’ 웨이드 데이비스 ‘투수 무덤’ 콜로라도서도 뒷문 꽉 선수 몸값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마무리 투수는 누구일까. 답은 콜로라도 소속 웨이드 데이비스(33)다. 데이비스는 올 시즌을 앞두고 콜로라도와 3년 총액 5200만 달러(약 556억 원)에 사인했다. 보장된 금액만 이 정도일 뿐, 성적에 따라 최대 4년 6600만 달러(약 705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올해 연봉은 1600만 달러. 내년에 1800만 달러, 2020년에 1700만 달러를 각각 수령한다. 옵션을 실행하면 2021년에 1500만 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 평균 연봉으로만 치면 뉴욕 양키스 아롤디스 채프먼(5년 8600만 달러, 평균 1720만 달러)을 뛰어 넘는 역대 불펜 투수 최고 몸값이 된다. 나머지 29개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도 보장 받았다. 콜로라도가 데이비스를 다른 팀에 보내고 싶어도, 선수가 해당 구단 이적을 거부하면 트레이드를 실행할 수 없다. 만약 트레이드가 성사되면, 콜로라도가 별도로 100만 달러를 데이비스에게 지급해야 한다. 달라진 소방수들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적 선수다. 데이비스는 2014년 이후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불펜 투수로 군림했다. 야구팬들 사이에 ‘캔자스시티 불펜 3대장’으로 불렸던 최강 불펜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홀드 1위와 평균자책점 1.00, 72이닝 무피홈런 109탈삼진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썼다. 2015년엔 부진한 소방수 켈빈 에레라 대신 마무리 투수 자리까지 꿰찼다. 8승 1패 18홀드 17세이브. 평균자책점 0.94는 그해 메이저리그에서 5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가운데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무엇보다 그해 월드시리즈를 포함해 포스트시즌 8경기에 출장해 10⅔이닝 동안 단 한 점도 주지 않고 1승 4세이브 18탈삼진을 기록했다. 캔자스시티 우승의 한 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풀타임 마무리로 뛴 2016년에는 승승장구하다 부상에 발목을 잡혔지만, 2017년 시카고 컵스로 이적해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4승 2패 32세이브, 평균자책점 2.30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뒤 거액을 받고 콜로라도로 팀을 옮겼다. ‘투수들의 무덤’으로 통하는 쿠어스필드에서 데이비스가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지만, 올 시즌에도 이미 두 자릿수 세이브를 돌파하면서 관록을 뽐내는 중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