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통해 한반도 운전자론을 들고 나왔을 때 국제사회는 물론 국내에서도 부정적 반응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지금,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봄’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지난해부터 미국과 북한 등을 물밑 접촉하며 정상회담을 위한 기반을 닦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임종석 레바논 방문 재주목
여권 인사들은 ‘청와대 2인자’로 불리는 임종석 비서실장이 지난해 12월 11일 레바논에 방문한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임 실장이 ‘모종의 임무’를 갖고 레바논을 다녀왔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임 실장은 문 대통령의 대북구상을 가장 잘 아는 인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일각에선 임 실장을 김정은 최측근이자 여동생인 김여정 부부장의 카운터파트너라고도 한다.
임 실장의 레바논 방문 당시 한반도 정세는 다급했다. 북한의 핵실험(9월)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11월)로 남북·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던 때였다. 전쟁가능성까지 거론됐었다. 그러나 이 기간 문재인 정부 대북라인에선 오히려 긍정적인 보고들이 올라왔었다고 한다. 핵실험 이후 강도 높은 대북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북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며 대화할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게 골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 실장이 문 대통령 ‘밀명’을 받아 레바논으로 향했고,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를 갖고 돌아왔다는 해석이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정보위원회 소속의 한 여권 의원실 관계자는 “임 실장이 갑작스레 레바논에 간 것은 북한 문제 때문인 것으로 안다. 누구와 접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임 실장이 직접 날아갔던 것”이라고 했다. 임 실장 위상을 감안하면 북에서도 김정은 최측근이 레바논을 찾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이번 정상회담 자문에 관여했던 한 정치권 인사도 “북이 입장을 바꿀 때까지 우리가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대북라인이 활발하게 가동됐었고, 임 실장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레바논에 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런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임 실장이 문재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인 동명부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설명했다.
# 김정은 신년사, 미리 알고 있었다?
서훈 국정원장이 이끄는 대북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남북 당국자 회담 의사를 밝혔다.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면서 북한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반성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독재자가 아닌, 정상국가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이려 했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부터 북과의 접촉을 늘렸다. 서훈 국정원장의 경우 김정은 측근이자 대남총책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핫라인’을 구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통해 달라진 북의 스탠스를 간파했고,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다고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 내용을 놓고 우리 쪽과 조율을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한 정보당국자의 말이다.
“겉으로만 보면 한반도에 위기가 고조된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해 11월경부터 대화 채널이 분주하게 가동됐다. 북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논의도 이뤄졌다. 김정은 신년사 이전에 북의 참가가 거의 확실시됐었다. 청와대와 관계 부처에서도 당국자 회담 등을 위한 실무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은 그리 새로울 게 없었다는 의미다. 아마 서훈 원장은 대략 파악하고, 문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신년사 발표 직후 남북 대화가 빠르게 진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지난해부터 양측 간 채널이 구축돼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정부는 화답이라도 하듯, 1월 1일 신년사 다음날 북에 고위급 회담을 제의했고 3일엔 판문점 연락 채널이 복원됐다. 앞서의 정보당국자는 “1월 4일 한미 연합훈련 연기가 발표됐는데, 이는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문 대통령의 선물”이라면서 “우리 쪽이 신년사 이전부터 (훈련 연기를) 미국과 긴밀히 합의했던 것으로 안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 트럼프 설득 위해 이방카 라인 구축
북이 ‘정상국가’가 되길 원한다는 시그널을 접수한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대북 문제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지 않고선 남북관계 개선이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공개적으로 여러 번 원색적 비난을 주고받은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신부터 제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여러 번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통’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개인 인맥까지 동원해 트럼프 대통령 측과 논의에 나섰다. 정보위원회 소속의 여권 관계자는 “북의 진정성을 트럼프 측에 알리는 게 필요했다. 북이 원하는 것은 핵이 아니라 경제적 지원이라는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했다. 핵폐기를 대화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트럼프 측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면서 “트럼프 딸인 이방카와의 라인도 구축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 직후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북과 대화를 추진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산되긴 했지만 평창동계올림픽 때 김여정 부부장과 펜스 부통령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우리 쪽 ‘작품’이었다. 이에 대해 한 친문 의원은 “북한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미북정상회담을 통한 경제제재 완화다. 우리가 트럼프를 끌어들이지 못했다면 남북정상회담도 열리기 힘들었을 것이란 의미”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