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교는 한국, 중국, 대만이란 잡지 못 할 세 개의 그림자가 항상 뒤따른다.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화교’란 다른 나라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국인’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만 약 4000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 한국화교는 당연히 한국 땅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중국인’들을 일컫는다. 1993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한국화교’는 구한말 시절 들어와 몇 세대에 걸쳐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대만 국적’의 중국인을 말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최근엔 ‘신 화교’와 기존의 ‘구 화교’로 나누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한국화교’는 후자를 말한다.
한국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과 역사를 함께한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 군이 조선 땅에 들어오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다. 이 시기부터 화교상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중국은 청이 망하고 위안스카이 정권-북양 정부-국민 정부-중화인민공화국 등 갖은 내전과 함께 집권 주체가 뒤바뀌며 혼돈이 계속됐고, 특히 많은 산둥성의 중국인들이 안정적 삶을 찾아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국화교는 다른 외국인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다. 벌써 6세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이제 겉으로 봐서는 한국인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현지화’ 됐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한국인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되는 ‘외국인’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한성화교협회의 곽원유 총무에 따르면, 한 때 8만 명에 달했던 ‘한국화교’는 이제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발생한 배화사건(1920~30년대 조선 땅에서 발생한 화교들에 대한 연이은 폭력 사건들. 대부분 일자리와 상권을 두고 행해짐)을 필두로 최근까지도 화교들은 한국에서 철저하게 배척받아 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화교들이 한국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귀화를 택했기 때문이다.
최준필 기자 = 2일 오후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일대 스케치. 18.05.02.
이렇듯 유서 깊은 ‘차이나 포비아’는 한국의 쇄국적인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다. 곽원유 총무는 과거 박정희 시대를 예로 들며 “그 시절엔 화교들의 식당을 50평 이하로만 하게 했다(1961년 외국인토지법 시행에 따라 외국인의 상업목적 토지 이용은 50평 이하로 제한됐다. 이는 사실상 화교들을 겨냥한 정책이었다). 그리고 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영업제한에 걸려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고 회자했다. 그리고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배화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왜 배척의 대상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곽원유 총무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내놓은 자식이지. 우리는 기대고 싶다. 중국은 부모세대의 고향이고, 대만은 국적이고,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하지만 세 곳 모두 다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다.”
이 말에 ‘한국화교’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모호한 그들의 정체성, 특히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거나 보호하려하지 않은 그들의 처지가 이 땅에 ‘배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약자에 대한 강자의 병탄은 진리에 가까우니 말이다.
한국화교는 앞서 말했듯 대부분 중국 본토인 산둥성에 뿌리로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 국적을 택했다. 한국에는 반공정부가 수립됐고, 당연히 중국이 아닌 ‘중화민국(대만)’과 우방이 됐다.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중국에 밀려 대만이란 낮선 섬에 한정됐다. 국적은 대만이었지만, 그곳은 그들에게 결코 고향은 아니었다. 고향은 또 다른 정권인 중국의 차지였다.
그들은 대만 여권을 쓰는 대만 국적 외국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만인이 아니다. 정확히 보자면, 그들은 무호적 국적자 신분이다. 대만에 호적이 없기에, 그들은 대만에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참정권도 제한을 받는다.
최준필 기자 = 2일 오후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일대 스케치. 18.05.02.
곽원유 총무는 “여권은 대만 것을 쓰지만, 사실상 현지엔 ‘주민등록번호’가 없기에 깡통 여권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그들이 택한 대만은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한국과 단교에 이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한국화교들에게 당시 사건은 충격이었다. 명동 중국 대사관서 청백기와 오성홍기가 교대될 때 많은 화교들이 울부짖었다. 미리 귀띔조차 없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곽 총무 역시 “의지하던 곳이 사라진 격”이라며 “이해는 했지만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이지 않나. 계속 들춰서 뭐 하겠나.”라고 혀를 찼다. 어설피나마 ‘조국’으로 여겼던 대만은 본토 중국의 성장과 위세에 밀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됐다.
이렇듯 한국화교에겐 ‘세 개의 그림자’가 따라 붙는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한국이란 그림자가 그들의 뒤에 붙는다. 하지만 그림자는 본인의 것이라도 잡을 수 없는 존재다. 세 나라 모두 그들에겐 잡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인 셈이다.
한 세기가 넘는 그들의 한국 이주사, 그리고 배화의 역사는 사람에게 ‘국가’, ‘민족’, ‘이념’ 그리고 ‘분단’이 무엇인지 너무나 절실하게 보여준다. 이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분명 시사점을 던져 주는 부분일 것이다.
한국화교는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현재 화교단체들은 대만 대표부는 물론 중국 대사관에도 등록돼 있다. 일부 지역의 화교 학교에선 본토의 ‘간체자’로 수업을 진행하며 중국의 커리큘럼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단다. 약자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곽원유 총무는 “이젠 중국 대사관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라며 “이는 대만 대표부도 이제 이해한다. 심정적으로야 여전히 대만과 가깝지만, 중국 대사관과 왕래하며 교류해야 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한국화교가 외국인임을 절실히 느낄 때 한국화교들은 상당 부분 ‘한국화’ 됐다. 대를 이어 한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한국어 구사는 물론 생활양식도 이젠 별 다른 차이가 없다. 요즘 젊은 화교들은 ‘조국’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거의 사라지고, 스스로를 한국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상당수는 귀화를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만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한국화교들은 몇몇 순간 자신의 신분을 실감한다고 한다. 다음은 화교들이 겪는 일상의 일들이다. ▲무역회사에 취업한 화교 5세 A 씨 화교의 직업 선택 자유는 당연히 제한돼 있다. 특히 공무직 취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식업 비중이 높은 이유도 그것이다. 화교 청년 A 씨는 어렵게 큰 무역회사에 취업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이 플러스 됐다. 하지만 A 씨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얼마 안가 혼쭐이 났다. 회사에서 긴급한 해외출장 업무가 떨어졌지만, A 씨는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국가들에서 무비자 혜택을 받는 한국 여권과 달리 자신의 대만 여권은 무조건 각 국가 대사관의 ‘비자’를 발급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A 씨는 비자 발급을 받지 못해 발이 묶이고, 동료들의 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화교 B 씨 B 씨는 최근 아들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의 아들 B 씨는 고등학생이었고, 이제 곧 성인이 된다. 하지만 B 씨의 아들은 성인이 되면 독자적인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개월 체류를 해야만 했다. B씨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본국은 대만이지만, 그곳은 고향도 아니었고 생면 부지한 낮선 곳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홀로 그런 곳에 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결국 B 씨는 귀화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귀화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 화교 C 씨 화교 C 씨는 아버지의 허락 하에 귀화를 결심했다. 하지만 첨부서류 준비 과정에서 난감해졌다. 국적법 시행령 3조 5항이 명시한 추천자가 필요했다. 이는 5급 이상 공무원, 판검사․변호사, 국회의원, 지자체장 등이다. 여행사나 행정사에서 이를 대행해 줄 수 있다곤 하지만 부르는 값이 엄청났다.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평생 대를 이어 살아온 자신이 왜 추천서가 필요한지 C 씨는 계속 생각했다. ▲화교학교를 운영하는 D 씨 지방에서 화교학교를 운영하는 교육자 D 씨는 요즘 폐교를 고민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화교의 수는 줄고 대만 국적을 유지하는 어린학생들도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화교학교에 보내기 위해 줄을 섰지만, 내국인 정원 제한 때문에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각한 경영난 속에서 D 씨는 괴롭다. [한] |
[언더커버]한국 화교이야기2-한국화교 출신 유명인, 누가 있나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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