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가수 김흥국이 4월 5일 서울 광진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박은숙 기자
지난 1일 대한가수협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임원과 관련한 대부분의 정관을 신설·개정한 안건을 통과시켰다. 변경된 정관 내용 가운데 가수협회장에 대해서는 ‘본 법인(협회) 선거 관리규정에 의거하여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조항을 ‘본 법인의 이사회 의결을 통해 추대한다’고 개정했다. 의결권을 가진 회원들의 직접 선거권이 배제되고 이사회를 통해서만 회장이 선출될 수 있도록 ‘간선제’로 고친 것이다. 더욱이 ‘선거 관리 규정에 의거하여’라는 문장이 삭제되면서 규정에 관계없이 이사회 의결을 통해서만 회장이 선출될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또한 회장 후보자는 협회 임원 역임자로 3년 이상 업무 경험이 있는 자로 한정했다.
회장 선출 권한이 이사회에게만 한정되면서 이사와 관련한 정관이 대폭 개정된 것도 확인됐다. 기존 정관에 따르면 협회 이사는 회장과 부회장을 제외하고 최대 총 18명을 둘 수 있게 돼 있다. 총회를 통해 선출되는 이사 12명과 회장이 직접 지명하는 지명 이사 6명으로 구성된다. 다만 지명이사의 경우도 “총회의 인준을 받아 선임할 수 있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그런데 개정안에는 이 조건과 상충되는 문구가 신설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회장이 임명한 이사는 위촉장을 받는 동시에 인준 효력이 발생한다”와 “지명이사의 경우는 회장의 지명으로 임명하고 총회나 회원들에게 문자나 서신으로 알림을 대신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 개정안대로라면 총회의 인준과 관계없이 회장이 임의대로 이사를 지명하고, 통보 형식으로 회원들에게 공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총회의 권리가 축소된 만큼, 총회가 구성될 수 있는 조건도 함께 축소되거나 삭제됐다. ‘의결권이 있는 재적회원 3분의 1 이상의 출석으로 구성한다’는 당초 조항이 ‘의결권이 있는 출석회원 또는 5분의 1 이상 출석으로 구성한다’고 변경된 것. 현재 가수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결권을 가진 회원이 약 200명 남짓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40여 명의 가수만 모여도 총회가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지난 1일 총회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만 65세 이상 임원 선임 불가’ 건도 이번 개정에서 신설됐다. 협회 측은 이 신설 정관에 대해 “협회 회원들의 평균 연령대가 너무 높아서 젊은 후배 가수들이 협회에 가입하고 활동하기가 어렵다. 협회가 더욱 발전하고 다방면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연령대를 낮추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새롭게 조항을 추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반대 회원들은 “국내 어떤 단체에서도 나이를 이유로 피선거권을 박탈하지 않는다.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임원 연령대를 제한하는 조항을 넣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 큰 문제는 오는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이사의 숫자가 적고, 이들 가운데 과반수가 현 회장 김흥국이 지명한 지명이사라는 점이다. 앞서 협회는 박일서 전 부회장 등 이사 3명을 해임했다. 또 협회 내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면서 선출 이사 가운데 2명이 자진 사퇴했다.
정관에 따르면 이들 선출 이사의 빈자리는 지난 임원 선출에서의 차점자가 채우게 돼 있다. 그런데 정관대로 따르지 않고 회장이 지명한 지명이사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게다가 현 이사회에서 회장을 추대해 선임하는 개정안이 통과된 터라,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원로 가수는 “3년간 정기 총회조차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협회 집행부가 이제 와서 긴급 임시 총회를 열고 급하게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은 (회장으로 나올) 누군가를 겨냥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날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소수였고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회원 95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개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위임장의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 게 없다”라며 “그렇다면 이 개정안이 과연 다수 회원들의 찬성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겠나”라고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협회 측은 개정안에 대해 “정관상 이사 임기는 3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이런 식이면 협회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한번 이사에 취임하면 영원히 이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정관 규정은 협회를 타성에 젖게 해 발전에 도움이 되지않았다”라며 개정 이유를 공식적으로 해명했다. 그런데 정작 개정안에서 단임으로 변경된 회장을 제외하면 이사들의 임기는 3년 연임으로 개정 전과 동일한 것이 확인됐다.
이번 개정안을 놓고 집행부를 제외한 협회 내 회원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릴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개정안이 승인되기 전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원은 “한국 가수계를 대변한다는 단체가 이렇게 집행부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걸 온 천하에 알리고 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라며 ”이런 식으로 운영될 협회라면 아예 문을 닫는 것이 낫다. 단순히 누구 편을 들자는 게 아니라, 그전에 최소한 법정 싸움이라도 막기 위해 선거 전 대책을 먼저 마련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협회 측 이해민 상임부회장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가수협회는 회장 개인의 희생과 봉사로 운영되는 것이다. 모든 임원들도 봉사의 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제명된 회원들의 일탈이 협회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라며 ”전문가들이 기존의 정관을 보고 엉터리라고 말했다. 한 임원이 10년 20년 계속 하는 단체가 어디 있나. 그런 점을 고치자는 것일 뿐인데 직무를 못한 임원에 대한 협회 내 징계와 제명 과정을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을 지양해 달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그러나 그외 개정안과 관련한 사실 확인 요청에 대해서 협회 측은 답변을 거부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무리한 정관 개정, 결국 박일서 겨냥(?) 협회 내에서는 이번 총회의 개정안이 김흥국과 갈등을 빚어왔던 박일서를 겨냥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월부터 회장 출마를 선언해 온 그를 마지막까지 견제하기 위해 연령 제한 조항을 신설하고 회장 선출 제도를 간선제로 변경한 것이 아니냐는 것. 박일서는 1952년생으로 올해 66세다. 박일서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지난 3월 중순경 협회가 부회장직 해임과 직무정지 5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해임에만 그쳤다면 부회장직을 내놓으면 그만이었지만 규정상 직무정지의 징계에 이른 자는 회장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당시에 그것까지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후 협회는 박일서를 ‘협회 발전 저해’와 ‘김흥국 미투 사건의 배후’라는 이유로 제명했다. 정관에 따르면 ‘협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설립 목적에 반하는 행위’를 할 경우 최대 제명에 이를 수 있다. 협회 측은 2일 기자회견에서 “지난 3월 이미 수석부회장 직에서 해임된 박일서가 ‘수석부회장’이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김흥국 회장의 추가 미투를 공개하겠다며 허위 제보했다”며 제명의 이유를 밝혔다. 또 앞선 미투 사건에서 피해 여성을 김흥국에게 소개한 인물과 박일서가 가까이 지낸 점을 들어 이 역시 박일서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협회 정관상 징계는 이사회에서 결정하며, 임원의 해임은 총회의 결의로 이뤄진다. 박일서는 “애초에 징계가 명확하게 이사회나 총회를 거쳐 결정된 것이 아니다. 현재 집행부 내 이사회가 정관과 맞지 않게 구성돼 있는데 그들이 결정한 징계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라며 “미투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 피해여성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협회가 근거 없이 허위 주장을 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만일 후에라도 있을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 등 재판에서 그의 주장대로 징계의 부당성이 인정된다면, 그는 다시 협회 회원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신설 조항에 따라 만 65세 이상에 해당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임원 복귀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개정안이 존재하는 한 박일서는 징계와 관련한 소송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 |
”차라리 문 닫아라“ VS ”대표 기구 있어야“ 대한가수협회의 내홍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관계자들은 “이 기회에 협회를 폐쇄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지난 3일 대한가수협회 원로회의 박일남 고문이 직접 김흥국 회장의 책임을 지적하며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겠다면 선배들이 나서 협회를 해산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 관계자는 “실제 활동하는 회원들이 고작 200여 명에 그치는 데도 ‘대한가수협회’라는 거창한 문패를 달고 활동하면서도 정작 가수들의 권리를 대변해주는 게 아니라 내부 분란만 불거지고 있지 않나”라며 “가수협회에 왜 젊은 가수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던 회원들이 탈퇴하겠나? 지금 와서는 누구도 가수협회 소속이라고 밝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한가수협회의 홈페이지는 2018년 5월 현재 접속이 막혀있는 상태다. 사진=대한가수협회 홈페이지 대한가수협회와 유사한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 단체는 한국가수협회다. 가수 선풍을 회장으로 한 이 단체는 2011년 설립돼 주로 지역 축제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만 회원이 대부분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명 가수이기 때문에 이들 단체가 가요계 전체를 대변하기에도 다소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다 보니 가요계에서는 대한가수협회의 무능을 지적하면서도 정작 협회 해체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외부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대한가수협회가 해체되고 난 뒤, 남겨진 가수들을 아우를 만한 단체가 없는 탓이다. 실제 지상파 등 주요 방송국과 직접 방송 협상권이 가능했던 단체가 대한가수협회였던 만큼, 설 무대가 줄어들고 있는 가수들에게는 이름값을 하는 단체가 절실하기 때문. 이와 관련 이동기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요건만 맞으면 어떤 단체도 허가를 내 준다. 가요계에서 단체가 난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설립 이후 대한가수협회가 한국 가요계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소속 가수들의 권익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지금은 협회의 이름이나 단체 존속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당초 설립 목적을 되돌아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