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후국기 씨(왼쪽)와 후인정 코치. 사진=이종현 기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후국기(국) “경기도 안산에서 10년 넘게 중화요리집을 하고 있다. 바쁘게 지내니 좋다.”
후인정(인) “한국전력 코치로 있다가 나와서, 모교 경기대에서 코치로 선수들 지도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수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3개월 정도 됐다.”
-후국기 씨는 강만수와 함께 금성통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대만 국적으로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한국 귀화를 고려하지 않았나.
국 “귀화 하고 싶어도, 당시는 전혀 고려 못했다. 아버지 반대가 심했다. 그 당시 화교 사회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절대 국적 못 바꾸게 하고, 한국여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특히 우리 집은 딸 다섯에 아들은 나 혼자였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귀화하라는 제안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도경비사령부 배구팀 감독이 직접 찾아왔다. 당시 수경사 사령관이 박정희 전 대통령 측근 윤필용 소장이어서, 하루면 국적 바꿀 수 있다 설득했다. 하지만 집에 상의도 못했다.”
-반면 아들 후인정 코치는 1995년 한국 귀화를 선택했다. 당시에는 친척들 반대 없었나.
국 “그런 거 없었다. 아버지인 내가 결정하면 끝인데, 친척들 반대할 게 뭐 있겠나. 인정이 실력도 나보다 월등했고 아깝더라. 국적만 바꾸면 한국 국가대표가 가능할 거 같은데. 인정이도 외동아들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난 아들만 셋이었다. 한명 정도는 국적 바꿔 열심히 하면 되겠다 싶었다.”
인 “대학교 2학년 때 귀화했다. 만 20세가 돼야 혼자 귀화가 가능하다.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생활 계속할 생각이었으니 한국 국적을 선택했다. 운동선수를 시작했으니 국가대표 한번 해봐야 한다는 꿈도 있었다. 대표팀에 선발될 실력이 안됐거나, 대표팀이 원하지 않았으면 국적 안 바꿨을 것이다. 운동 때문에 국적 바꾼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
국 “인정이 빼고, 나, 부인과 둘째, 막내아들 다 여전히 대만 국적이다. 우리집은 본토 산둥성 출신이다.”
-후국기 씨는 대만 국적을 가지고 선수생활과 지도자로 일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실업배구팀 금성통신의 전성기를 이끈 후국성 씨. 선수와 지도자를 하면서 한국화교 출신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국 “말도 못했다. 당시 실업팀인 금성통신은 단일팀으로 외국에 친선경기를 많이 다녔다. 한 번은 이집트 배구협회의 초청을 받아 금성통신이 이집트에서 경기를 펼치기로 했다. 비행기가 직항으로 이집트까지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다 프랑스 공항 입국장에서 통과했는데, 나만 잡았다. 대만 국적자는 비자가 필요한데, 안 받았으니까. 회사에서도 문제가 될지 전혀 몰랐다. 결국 대한항공 직원을 불러, 그 사람이 보증해줘 입국했다. 하지만 프랑스 공항을 떠나는 순간까지 경찰이 양 옆에서 지켰다. 이집트 공항에서도 처음에는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이집트 배구협회 회장이 나서고 나서야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기 잘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또 잡았다. 비행기 안에까지 와서 ‘날 잡아야 한다’고 문제 삼았다. 그때 정말 출국 못할 뻔 했다.
후국기 씨가 말한 대만 여권의 ‘비자 발급’ 문제는 한국 화교들이 겪는 흔한 어려움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선 앞서의 ‘[언더커버] 한국화교 이야기1-그들에겐 ‘세 개의 그림자’가 있다.’ 기사 참조.
선경인더스트리 감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일본 실업팀과 연계해 오가며 경기를 치렀다. 1년에 한 번씩 전지훈련도 실시했다. 일본에 가야하는데 비자 받기가 힘들었다. 선경에서 ‘우리 직원이다. 일본 전지훈련 간다’ 설명을 해도 안 내줬다. 왜냐면 당시 화교들이 3개월짜리 비자를 받아 일본에 들어가면 취업한다고 다 숨어버렸다.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동남아 불법 체류자들처럼. 그래서 일본 자매팀에 부탁해야 했다. 그럼 그 팀에서 일본 외무성에 찾아가 ‘우리가 후국기를 초청한다’ 초청장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일본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이 먼저 일본에 건너가고, 감독인 난 제일 늦게 갔다.”
경기대에서 코치를 맡고 있는 후인정. 그는 한국으로 귀화해 한국 국가대표를 지냈다. 사진=이종현 기자
국 “한국에 사는 화교들은 붕 떠있는 상태다. 과거와 달리 화교들도 한국의 생활을 따라가고 있다. 중국의 어린이날은 4월 4일이다. 근데 요즘 한국화교들 5월 5일을 챙긴다.”
인 “우리 집에서 나만 중국어를 못한다. 듣는 건 알아듣는데, 말하는 건 간단한 회화만 된다. 누가 거들어줘야 중국말을 썼을 텐데, 한국선수들과 단체생활을 오래 하면서 안 쓰다보니까 잊었다.”
국 “우리는 어릴 때 밖에서는 한국친구들과 한국말을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한국말 못했다. 한국말 하면 아버지에게 혼났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다보니 그때는 한국말 이렇게 유창하지 못했다.”
-후국기 씨도 귀화를 할 생각 없으신가.
국 “인정이 귀화할 때만 해도 기회가 좋았다. 국가대표 선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협회에서 협조 요청도 해서 며칠 만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당시는 일반인들도 국적 취득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국적 받기 힘들다. 화교뿐 아니라 한국에 귀화하려는 외국인 신청이 워낙 많다. 조건도 까다로워 나처럼 평생을 한국에서 산 사람도 한 번에 안 내준다. 이런 저런 조건에 2차, 3차 퇴짜 맞고야 겨우 나온다. 그나마 우리 부부는 나이가 있으니까 화교로 그냥저냥 사는데, 둘째아들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국적으로 바꿔주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자식사랑은 화교나 한국인이나 매한가지다. 후국기 씨는 자녀의 귀화 문제를 두고 여전히 고민 중이다. 이는 후 씨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땅을 살아가는 많은 한국화교들이 자녀의 장래 문제 때문에 귀화를 고민한다. 아직까지 이 사회는 귀화를 하지 않는 화교들에게 만만치 않은 곳이다. 많은 화교 부모들이 실제 자신의 귀화는 뒤로 미뤄도 자녀들의 귀화를 먼저 추진하는 경우가 즐비하다.
-후인정도 현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후국기도 다시 지도자나 배구계 진출 의지 없나.
국 “의향 전혀 없다. 내가 지도자할 때와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아버지 후국기 씨(오른쪽)와 후인정 코치. 사진=이종현 기자
-앞으로 계획이나, 한국화교로서 바라는 점은.
인 “계속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선수시절엔 국가대표 발탁과 팀 우승이 목표였다. 선수생활하면서는 내가 누릴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다 한 것 같다. 지도자를 하다보면 언젠가 프로팀에 다시 갈 수 있지 않겠냐. 급하지 않게 천천히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게 좋은 것 같다.”
국 “바라는 것 없다. 대만에서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한국이 인정해달라고 하는 건 욕심이다. 그래도 지금은 양호한 편이다. 화교들은 국회의원과 지방선거 투표권은 있다. 대통령 선거 투표권만 없다. 옛날엔 그런 것도 없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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