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뿐만이 아닙니다. 2017년 8월 15일, 동대구역 11번 플랫폼에서 60대 남성이 KTX 열차가 진입하던 선로로 뛰어들어 사망했습니다. 바로 전날, 오전 11시 13분경 의왕역에서도 10대 여성이 선로로 투신해 서울로 향하던 KTX 열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KTX 열차 선로 주변에서 연이어 사망사건이 발생하는 ‘죽음’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먼저, 연속적인 사망사고의 양상을 살펴보면 ‘시스템’의 허점이 보입니다. KTX 정차역에선 승객들이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선로에 진입하거나 고속열차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일반 지하철 역사와 달리 열차의 정차 위치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안전 사고의 원인을 단순히 개인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스크린도어는 승객의 선로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예방책입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예산문제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장 관계자들도 어렵다고 합니다. KTX 정차역 스크린도어 설치,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전철남’ 기자가 KTX 고속열차 스크린도어를 둘러싼 논란을 추적했습니다.
용산역 KTX 승강장. 이종현 기자
2018년 5월 9일 오전 10시경, 서울 용산역에 KTX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쪽에 서있는 승객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승객들이 오가는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숨은 1인치’가 있습니다. KTX 열차와 승객들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점입니다. 자칫 승객들이 발을 헛디디면 선로에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용산역 KTX 승강장 모습. 이종현 기자
계단 쪽을 한 번 살펴볼까요? 계단 옆 승강장 공간이 비좁아 보입니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승객이 보이시나요? 보행 통로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시각장애인도 이곳을 지날 때 KTX 열차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객의 선로 진입을 막을 수 있는 감시 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의중앙선 왕십리역 승강장. 고성준 기자
사진은 왕십리역 승강장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지하철역의 풍경은 KTX 정차역과 다릅니다. ‘좌우 개폐형’ 스크린도어가 승객의 선로 진입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율은 94.7%(2017년 기준)입니다. 지하철 안전사고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온 배경입니다.
하지만 KTX 정차역에는 스크린도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지금껏 인명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KTX 열차의 스크린도어 설치 문제는 논란을 일으켜왔습니다. KTX 정차역 환경이 ‘좌우 개폐형’ 스크린도어 설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KTX 정차역에는 지하철역과 달리 새마을호 등 다른 열차들도 정차합니다. 각 열차들의 출입문 크기와 높이, 위치가 다양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형태인 좌우 스크린도어 설치가 까다롭습니다. 출입문의 위치가 한결같이 똑같은 지하철과 다릅니다.
김선욱 철도노조 미디어 실장은 “KTX 고속 열차,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출입문 위치가 전부 다르다. 좌우 스크린도어 설치가 어렵다”며 “예를 들어, 용산역 8번 홈을 KTX 열차만 쓰지 않는다.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도 쓴다. 일괄적으로 출입문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정차 위치를 맞추기 어렵다”고 분석했습니다.
KTX고속열차 출입문(좌)과 발판
다른 현장 관계자는 ‘고상홈’과 ‘저상홈’의 차이에 주목했습니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객실 높이와 승강장의 높이가 같은 고상홈은 사람이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스크린도어 레일 설치가 가능하다”며 “하지만 저상홈은 승강장과 객실 높이가 차이가 있다. 책 한 권 정도의 공간뿐이다. 작업자들이 밑에서 스크린도어 레일을 설치하기 어렵다. 공사 자체가 난해하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발판’ 역시 또 다른 변수입니다. KTX 열차 등 ‘저상홈’에 정차한 열차들은 ‘발판’이 필수입니다. 승객들이 ‘발판’을 딛고 올라서야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앞서의 김선욱 실장은 “지하철은 승객이 타고 내릴 때 발판이 없어 수평으로 승차할 수 있다”며 “KTX를 포함한 일반열차는 발판이 있다. 스크린도어를 기존의 홈에서 안전선 쪽으로 설치해야 한다.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KTX 정차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실망은 이릅니다. ‘로프형’ 스크린도어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는 2017년 4월 ‘스크린도어 안전종합대책’의 일환으로 충남 논산역에 로프형 스크린도어 시험가동에 들어갔습니다. 로프형 스크린도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상하 개폐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한국철도시설 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로프형 스크린도어는 1년 동안 설치한 뒤 최근 철거해 교통연구원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구지하철 2호선 문양역에 설치된 ‘로프형’ 스크린도어, 대구도시철도공사 제공
위 사진이 보이시나요? 2013년 한국교통연구원이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대구지하철 2호선 문양역에 설치한 로프형 스크린도어입니다. 당시 로프형 개발에 참여한 신판주 연구원(한국교통연구원 철도교통연구본부)은 “로프형에 대한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문양역에 설치했고, 그 이후 논산역이 시범역사로 선정된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신판주 연구원은 “로프형 스크린도어는 다양한 차종이 운행되는 승강장에 적합하다”며 “로프형은 차량에 따라 출입문 위치나 개수가 달라도 설치가 가능하다. 로프형이 기둥을 뺀 나머지 부분을 전부 개방하기 때문이다”며 “승차위치가 어디가 됐든 손쉽게 승하차가 가능한 시스템이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 “논산역 시범운영 과정에서 성과가 좋았다. 무엇보다 승객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며 “특히 계단 옆 보행 통로가 폭이 좁았었는데 로프형 스크린도어가 승객들의 선로 접근을 차단해 안전성을 확보했다”고 전했습니다. 좌우 개폐형 스크린도어 설치가 어려운 KTX 정차역엔 ‘로프형’이 적합하다는 게 신 연구원의 주장입니다.
용산역 승강장에 정차한 KTX 고속 열차. 이종현 기자
대구도시철도공사 측도 로프형 스크린도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문양역에 설치된 로프형의 줄이 선로부와 승강장부를 완전 차단해서 승객의 안전을 확보했다”며 “로프형이 설치된 2013년 4월 이후, 선로 투신과 침입 관련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다양한 차종이 오가는 일본과 유럽 등 해외 역사에 로프형 스크린도어를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로프형’ 스크린도어 도입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국토부는 “논산역에 연구개발사업으로 시범 설치한 것일 뿐이다”라며 “올해 KTX 정차역에 스크린도어 사업 예산이 잡힌 게 없다. 고속철도는 구간이 워낙 길다. 비용이 한 두푼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했습니다. 결국 돈 문제라는 겁니다. 지하철에 이어 KTX를 ‘자살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지금 목숨보다 돈이란 비난이 제기되는 것이지요.
국민의 생명은 경제적 ‘비용’보다 중요한 가치입니다. 더구나 로프형 스크린도어는 다양한 차종이 오가는 일본과 유럽의 역사에 이미 광범위하게 도입됐습니다. KTX 고속열차의 최대 시속 300㎞, 가장 선호하는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은 KTX, 매년 일어나는 ‘선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정부의 결단이 절실해 보입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전철남-지하철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장 친숙한 교통수단입니다. 시민들의 발이지요. 하지만 친숙한만큼 각종 사고와 사건, 민원들이 끊이지 않기도 합니다. <일요신문i>는 자칭 지하철 덕후 기자의 발을 빌어 그동안 궁금했던 지하철의 모든 것을 낱낱히 풀어드립니다. ‘전철남’의 연재는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