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천재소년 사토 씨 이야기가 TV도쿄에서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TV도쿄 캡처.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봄. 사토 가즈토시(당시 17세)는 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어린 나이에 상대성이론을 마스터함과 동시에 국립 지바대학교 물리학과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대학 조기입학자였다.
그리고 ‘물리 천재소년’은 올해 37세가 됐다. 현재 하는 일을 묻자, 그는 이렇게 전했다. “트럭 운전사다. 출근시간이 불규칙해 새벽 3시부터 달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무라서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제대로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어떤 길을 거쳐 신동은 트럭 운전사가 됐을까. 사토는 이렇게 되돌아봤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선생님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소멸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진심으로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수학이나 이과 과목은 모두 만점을 받았다.”
이후 사토는 고교 3학년을 월반해 지바대학 공학부 물질공학과에 다니게 됐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취재가 이어졌고, 적잖은 유명세도 따랐다. 석사과정을 마치고는 미야기현에 있는 재단법인 연구소의 연구직으로 일했다. 당시 불경기 여파로 대학원을 졸업해도 연구자로서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왕년의 천재소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사토는 이에 대해 “연구직 월급이 세후 20만 엔(약 200만 원) 정도다. 게다가 1년 단위 계약직이라서 몇 년을 갱신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나는 이미 대학원 시절 결혼을 해 딸도 낳은 터라 좀 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주간겐다이’에 의하면 “사토 씨의 총명함은 세컨드 커리어를 찾을 때 도움이 됐다”고 한다. 시리즈 영화 ‘트럭 야로’의 열렬한 팬이었던 사토는 대형면허, 대형특수면허, 견인면허를 학원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곧바로 트럭 운전사 일자리를 얻었다.
사토는 “연구원으로 일할 땐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학원강사 아르바이트도 겸했다. 물리를 가르치고, 수학을 응용하는 일이 무척 재미있어서 연구원을 그만두고도 몇 년 동안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다만 이 역시 불안정한 직장이라 트럭 운전에 정착했다”고 밝혔다. 면허를 가지고 있으면 일단 일이 끊길 염려가 없다. 지금 직장은 올해로 4년째. 세후 실수령액은 한 달에 350만 원 정도로, 매달 수입이 안정적이다.
연구직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사토는 “어쨌든 트레일러를 몰고 달리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외 일도 병행 중이다. 의대를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트럭 운전사에 중점을 두되 과외도 늘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겐 가르치는 일도 즐거우니까”라고 덧붙였다. “연구직에 집착하기보다 가족과의 시간,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지금 모습에 만족한다”는 얘기다. 이에 ‘주간겐다이’는 “사토 씨의 미소에서 후회는 느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천재소년’의 뒷이야기도 전해졌다. 1991년 사법시험 1차를 사상 최연소, 15세 나이에 합격한 미요시 마사노리도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 뒤 “미요시는 사법시험에 전념하기 위해 ‘단위제(학점제)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고교에서는 법률이 아니라 컴퓨터에 흥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 졸업 후에는 IT회사를 창업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요시가 세운 회사는 2016년 해산 절차를 밟았다.
이후 몇몇 매체가 미요시의 집을 방문했지만 “이사를 한 상태라 만나지 못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근처 주민 역시 “아무도 그의 근황을 모른다”고 했다. 과거 미요시는 창업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천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건 매우 힘들다.”
1991년 일본 문학계에 신동이 나타나 떠들썩했다. 6세 유치원생 다케시타 류노스케가 쓴 동화 ‘천재 에리짱 금붕어를 먹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1995년부터는 그림책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지 않다. ‘주간겐다이’에 의하면, “다케시타는 게이오대학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잡지는 “현재 다케시타가 이혼 전담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동이라고 불리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셈이다.
기후현에 거주하는 스즈키 타로도 ‘한자 신동’으로 유명했다. 2004년 일본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에서 당시 최연소 기록인 11세로 합격하는 영예도 안았다. 관련 시험은 합격률이 10% 내외인 만큼 “꽤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스키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실 그 전까지 나는 존재감이 미미한 소년이었다. 방송 출연 및 신문 기사 덕분에 학교에서의 위치가 확연히 달라져갔다.”
스즈키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제지리올림픽’ 일본 대표로도 선발됐다. 하지만 좌절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대회에 나온 친구들이 모두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감히 내가 신동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동세대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첫 번째 좌절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입시에 실패하면서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는 “교토대에 갈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는데,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결코 천재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줬다. 그로부터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말을 이었다.
이후 “스즈키는 고베대학에 입학해 신문부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주니치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스즈키는 끝으로 이렇게 전했다. “한자 신동으로 불렸던 것이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했으니 고마운 일이다. 지금은 ‘그런 때도 있었지’하며 추억하는 정도다. 딱 그뿐이다. 이제는 컴퓨터로 치면 쉽게 한자가 변환되는 시대이지 않는가(웃음).”
일본 언론이 보도한 천재소년들의 ‘그 후’ 삶은 다양했다.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위에는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인생과 타협하면서 신동은 평범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