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가 한화에서 1년간 뛰던 2012년, 한 팬이 대전 시내 한 고깃집에서 일행과 식사를 하고 있는 박찬호를 발견했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사인을 청했고, 박찬호는 흔쾌히 요청을 받아 들였다. 문제는 박찬호가 그 팬이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였다.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 박찬호는 팬에게 “아직 젊으니 꿈을 크게 가져라”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도전할 때는 그러지 않았다”와 같은 덕담과 충고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팬은 박찬호의 이야기를 듣다가 다 식어 버린 갈비를 먹어야 했다는 후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찬호는 식당을 나서면서 다시 그 팬에게 다가와 한화 달력을 선물로 줬고,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라.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인터넷에는 “나도 박찬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말을 걸었다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눠야 했다”는 후일담이 줄을 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박찬호를 욕하려고 쓴 글들이 아니다. 오히려 다들 박찬호의 ‘정성스러운’ 팬서비스에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일부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청했다가 거절을 당했거나 무뚝뚝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던 팬들은 박찬호의 ‘너무 많은 말’에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
# 팬서비스, 프로 선수의 의무가 맞다
프로 선수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화다. 최근 KBO 리그에선 선수들의 ‘팬서비스’가 갑자기 도마 위에 올랐다. 원정 구장에 도착한 A 구단 일부 선수들이 팬들의 사인 요청을 무시한 채 바삐 지나치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공개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동안 “팬서비스에 소홀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부 스타 선수들의 이름도 다시 함께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수년 전의 실수나 오해가 다시 언급돼 곤욕을 치른 선수들도 나왔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공개적으로 “내 뜻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명하거나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과 글을 올리기도 했다.
구단들도 다시 한 번 각성했다. B 구단 관계자는 “우리 팀은 수시로 선수들에게 ‘팬들의 사진이나 사인 요청을 무시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긴 한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선수들에게 팬서비스의 중요성을 주지시켰다”며 “아무리 구단이 팬을 위해 이런저런 이벤트를 마련해도, 결국 팬들이 가장 원하는 건 좋아하는 선수와 악수를 하거나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다. 선수들이 그걸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선수들 역시 팬서비스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들 역시 프로에 오기 전, 다른 야구선수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C 선수는 “초등학교 시절 장종훈 선수(현 한화 수석코치)에게 사인을 받았는데, 야구를 한다고 했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구 열심히 하면 여기 형들처럼 될 수 있다’고 해서 며칠 동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며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어린이 팬들의 사인 요청은 특히 신경 써서 응해준다”고 했다. D 선수 역시 “나를 보려고 야구장 밖에서 오랜 시간 기다린 분들이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모든 분들께 사인을 해드리고 싶다”며 “시간상 어쩔 수 없을 때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그게 결국 팬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사실 앞서 비난을 받은 A 구단 선수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홈구장이 아닌 원정 구장에선 선수들의 이동 시간에 한계가 있다. 팬들 시선에서는 원정 팀 선수들이 경기 시작 한참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선수들에게는 경기 전 소화해야 할 훈련 루틴이 있다. 많은 구장에 원정팀 라커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 훈련 시작 직전에야 야구장으로 들어오는 게 현실이다. 곧 경기를 앞둔 선수들은 얼른 더그아웃에 짐을 풀고 몸을 푼 뒤 경기를 준비하는 게 먼저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야구장을 빠져 나와 구단 버스에 올라야 하고, 자칫 사인을 해주다 버스 탑승 시간이 늦어지면 많은 선수가 출발도 못한 채 자신을 기다려야 한다. 베테랑 선수도 눈치가 보일 판에 신인급 선수라면 더 팬들 앞에 멈춰 서기 어렵다. 수많은 팬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주말에는 더 그렇다. 무엇보다 팀이 연패 중이거나 당일 경기에서 지기라도 하면 선수들도 얼른 버스 안으로 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프로야구장을 찾은 팬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와 무관합니다. 일요신문 DB
# 팬서비스를 방해하는 ‘전문 사인꾼’
팬서비스가 프로야구 선수의 의무라는 명제는 흔들림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팬들이 선수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매너’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이 남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E 선수는 “나는 팬들의 사랑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웬만하면 사인은 할 수 있는 한 다 해드리려고 한다. 경기가 끝난 뒤 30분이 넘게 사인을 해주다 간신히 집에 간 적도 있다”며 “하지만 어떤 팬 분은 나를 붙잡더니 주머니 속에서 잔뜩 구겨졌던 영수증 하나를 꺼내 ‘뒷면에 사인 좀 해 달라’고 내미시더라. ‘사인 받고 버리시면 안 된다’고 농담하면서 사인을 해드리긴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또 “한번은 팬 세 명이 함께 와서 반으로 접은 이면지 한 장에 내 사인을 받더니 서로 누가 이 사인을 가져갈지를 놓고 내 앞에서 가위 바위 보를 했다”며 “아무리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사인이라 해도 조금 민망했다”고 했다.
이뿐 아니다. 야구장 주변에는 일명 ‘전문 사인꾼’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법 판매할 목적으로 사인을 ‘수집’해가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팬’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부류들이다. 한 KBO 레전드 선수가 “내 사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사인을 주저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가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발언에는 이렇게 자신의 사인이 일부 개인의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게 싫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일부 스타 선수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찾아가 그들을 기다리는 극성팬들이 존재한다. 이 팬들이 한 번도 아니고 매번 야구공이나 종이에 사인을 받아 가면, ‘내 사인을 판매하려고 한다’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유명 선수의 사인볼이 적게는 수천 원에서 많게는 수만 원까지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행여 오해로 생사람을 잡을 수 있으니 묵묵히 사인을 해주곤 하지만, 선수들로선 뒷맛이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가끔씩 사인을 받고 돌아선 뒤 선수에게 들리는지도 모른 채 일행에게 “이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겠다”며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라 팀을 이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다. 선수 한 명씩을 나눠 맡는 ‘분업’ 체계를 구축해 사인을 무더기로 챙겨 간다. 특히 각종 프로야구 시상식이 연이어 열리는 11월과 12월에는 시상식장 곳곳에서 이들을 볼 수 있다. 시상식 일시와 장소 등이 언론에 미리 공개되고 수상자 명단도 대부분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상식장 밖에서 선수들을 기다리는 것은 물론, 시상식이 막 끝난 후 수상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거나 식사를 하느라 어수선한 틈을 타 장내까지 진입한다. 미리 준비해둔 야구공 여러 개를 차례로 내밀며 선수들에게 사인을 요구한다. 선수들은 울상을 짓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다. 그 안에 진짜 팬이 끼어 있을 수도 있어서다.
# 선수와 팬,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선수와 팬이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팀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F 투수는 “다른 날은 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을 해도 괜찮다. 하지만 선발 등판하는 날은 경기 전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게 내 나름의 원칙이었다”며 “일단 한 분에게 해주면 주변에 계시던 많은 분들께 다 해드려야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사인을 많이 했던 날 대량 실점한 징크스가 있어서 더 피한다”고 했다. 또 “자주 본 팬들께는 그 부분에 대해 양해를 구했지만, 그걸 잘 모르는 분은 뒤에서 욕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그런 게 미안해서라도 등판하지 않는 날은 최대한 많은 분께 사인을 해드리려고 한다”고 했다.
G 선수 역시 “팀 선배들에게 ‘어린이 팬들은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특히 상처를 많이 받는다. 집에 있는 아들, 딸을 생각해서라도 꼭 챙겨 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어린이 팬들이 내 사인을 많이 요청하면 오히려 나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다만 “차를 몰고 퇴근할 때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 나와 막아서는 것은 서로에게 너무 위험하니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H 선수 역시 “급할 때 사인 받을 만한 종이가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다른 팀, 다른 선수 유니폼에 내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 건 솔직히 둘 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귀띔했다.
선수들 역시 팬들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팬들은 선수가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더 상처를 받는다. 기다리던 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며 양해를 구하거나, 정중하게 당장 사인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떠나는 선수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 사인지를 내밀었을 때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짓거나 손을 휘휘 내저어 ‘비키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선수에게 화살을 겨눌 뿐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힐만 감독 ‘팬 있어 선수가 있다’ 수시로 깜짝 이벤트 유일한 외국인 사령탑인 트레이 힐만 SK 감독은 유독 팬서비스에 적극적이다. 구단이 요청하는 팬 관련 이벤트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구단에 팬서비스 행사를 제안하기도 한다. 최근 인천 시내 한 쇼핑몰에서 열린 선수단 사인회가 바로 그랬다. 힐만 감독은 부임 이후 줄곧 “프로야구는 지역 사회의 일원이다. 지역과 함께하는 지역밀착형 팬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강조해왔다. “팀이 팬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가야 한다”는 얘기도 했다. 구단에 직접 인천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사인회를 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힐만 감독. 사진 출처=SK 와이번스 홈페이지 이뿐 아니다. 지난해에는 부임 직후 경기장 입구에서 직접 팬들을 맞이하는 깜짝 이벤트를 펼쳤다. 입장하는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음식을 일일이 나눠줬다. 사진도 함께 찍었다. SK 관계자는 “이때도 구단이 아니라 감독님이 먼저 ‘이런 서비스는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시절에도 같은 이벤트를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평소 소아암 환우를 돕는 일에 관심이 많은 힐만 감독이 기부 목적으로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어린이날인 5월 5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아내 마리 힐만 여사와 함께 인하대병원 소아병동을 방문하기도 했다. 총 12개 병실을 찾아 40여 명의 환우를 만났고, 선물과 함께 격려 인사를 건넸다. 이후 SK 선수단이 소아암 환우를 위한 헌혈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나도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구단으로부터 “외국인이라 규정상 안 된다”는 답변을 듣고 아쉬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힐만 감독이 이처럼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펼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팬이 있기에 프로야구 선수가 존재한다”는 신념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최근 팬서비스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같은 생각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하지만 ‘쌍방 소통’의 중요성 역시 역설했다. “선수들도 각자의 입장이 있다. 팬들과 만나는 게 쑥스럽거나 내성적인 선수들이 있을 수도 있고, 퇴근 이후 가족과 약속이 있어 빨리 가봐야 하는 선수도 있다”며 “사실 야구선수라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시즌이 길고, 원정 경기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가족과 관련해서는 이기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은 선수들과 팬들의 동선이 아예 다르다. 미국과 일본이라고 해서 모든 선수가 팬들에게 잘하는 것은 아니다. 팬들과 접촉을 꺼리는 선수가 당연히 있고, 반대로 선수들에게 매우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팬들도 있다”며 “선수들은 팬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팬들 역시 배려를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