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은 “이제 국민이 직접 나서 달라” “나라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항상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국민 행동’을 촉구했다. 한일관계와 남북관계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 3·1절 기념사와는 달리 박 전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 기념사의 절반을 할애했다. 4·13 총선을 불과 4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지난 5월 8일 청와대 본관 세종실. 문재인 대통령은 제20회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한 지 한 달이 지났는 데도 국회에서는 심의 한 번 하지 않고 있다”며 불과 1년 전까지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야권 주도로 공전이 계속되는 국회를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또 “민생 추경과 같은 비정치적 사안을 정치 상황과 연계시켜 상정조차 하지 않고 논의를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4월 24일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국무회의에서도 문 대통령은 국회를 겨냥했다. “국회는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모아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단 한 번도 심의조차 하지 않은 채 국민투표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비상식이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의 정치를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문 대통령은 작심한 듯 국회를 몰아세웠다. 문 대통령의 잇따른 발언도 6·13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나왔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0일 오전 8일째 단식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박은숙 기자
두 사례는 불과 2년의 세월을 두고 여야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선거를 목전에 둔 여야가 ‘드루킹 파문(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을 둘러싸고 국회를 완전 마비시켜 놓은 채 특검 대결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곱씹어볼 장면이다. 하지만 싸움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10년 가까이 야당 생활을 하며 싸워본 경험이 많은 민주당의 특검 저지력이 돋보인다. 되는 집은 가지나무에도 수박이 넝쿨째 열린다 하더니만, 때마침 불어온 남북 화해의 바람은 특검 이슈를 여론의 중심에서 멀찍이 떠밀어내고 있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경우 릴레이 철야농성에다 김성태 원내대표의 단식까지 이어졌지만 특검 카드는 이미 때를 놓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이 5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특검을 전격적으로 받아준다고 해도 그 절차를 감안할 때 지방선거 때 카드로 활용돼 파괴력을 가질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는 얘기다.
특검을 둘러싼 갈등은 ‘기울어진 운동장’ 정국이 당분간 바뀔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고, 현재 야권의 창으로는 여권의 방패를 뚫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중이다. 포스트 홍준표 등 제1야당에서의 당내 권력 구도 변화 등 야권 지형의 대변동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정계개편이 임박했다는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민주당은 드루킹 파문이 터진 뒤 일관되게 “경찰 수사를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라며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당 소속 김경수 의원이 경남도지사 출마선언을 하면서 “특검 수사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당 전체의 전략 등을 고려하면 굳이 드루킹 문제를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민주당은 야당의 주장을 ‘정쟁용 특검’이라는 프레임에 묶어두고 “(특검 주장은) 사법부와 경찰을 무시하는 것” “보수정권 하에서 검경이 정권 눈치보기 수사를 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라며 역공세 작전을 폈다. 민주당으로서는 특검 갈등으로 인해 국회가 장기 공전될 경우, 개헌안·추경안·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 등이 줄줄이 차질을 빚을 것이 뻔했다. 특검 거부가 문재인 정부의 개혁 동력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는 사안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첫 심판대라 할 수 있는 지방선거·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특검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부 출범 이후 첫 시험 성적을 F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특검 절대 불가라는 간판을 내걸고 특검 지연 작전에 나섰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사실 민주당 내에서는 “김경수 의원이 떳떳하다는 데 특검 못 갈 이유가 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특검을 일찌감치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잘한 판단이었다는 게 민주당 상당수 의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경찰이 초동 수사를 더디게 하는 등 문제가 많지만 이 사건 자체가 보수 성향이 많은 50대 이상 연령층이 이해하기 힘든 인터넷 댓글 분야여서 급속한 반발 여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며 “때마침 남북회담 분위기까지 타면서 강력한 이슈로 올라서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특검은 대선 불복’이라는 프레임도 먹힌 것 같다. 민주당이 운이 좋은 것이기도 하고, 여론을 잘 살피고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은 특검 관철만 되면 마침내 여당과의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을 너무 끌었다. 홍준표 대표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미투 사건,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외유 파동 등이 났을 때 “이 정도로는 판을 뒤집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으나 드루킹 파문은 달랐다. 대역전의 희망을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본 자유한국당은 노숙 투쟁 카드에 이어 김성태 원내대표의 단식 돌입 등 초강수까지 뒀지만 특검을 결국 조기에 이뤄내지 못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국 주도권 확보에 사실상 실패한 셈이다. 여당의 힘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당내 세력 결집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여당에 밀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권의 특검 저지 전략을 깨뜨릴 만한 단합된 힘의 응집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게 당 안팎의 목소리다.
한국당은 내부가 몹시 시끄럽다. 선거가 코앞이지만 전국적으로 여권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강력한 ‘특검 대오’를 형성해야 할 당내 의원들의 생각은 이미 2020년 총선에 가있고 이 예측치를 바탕으로 대다수 의원들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당 의원들 가운데 “현재의 홍준표 대표 체제가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은 점도 투쟁력 약한 한국당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검을 강하게 밀어붙일 일사불란한 대여 투쟁 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홍 대표는 1년 이상 임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6월 지방선거 이후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통해 명실상부한 자유한국당 리더가 되려 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4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권은 물론, 2022년 대선 고지를 향한 자리다. 지난해 7월 취임 이후 이미 당을 상당 부분 장악한 만큼 일단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한국당 내부의 ‘홍준표 불가론’은 최근 들어 급속히 확산 중이다.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국민 여론과 동떨어졌다는 비난을 받은 홍 대표의 언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 내부 일부 관계자들은 정부여당을 가장 많이 도와주고 있는 것이 홍 대표라는 직격탄도 쏟아냈다.
결국 ‘포스트 홍준표 체제’에 대한 한국당 내부 여러 가지 생각들이 특검을 조기에 만들어내지 못한 원인이 된 동시에 향후 새 리더 탄생을 통해 새판짜기를 불러오는 결과물이 될 수도 있다. 한국당 내부에서는 이미 포스트 홍준표 주자로 이완구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심재철(5선)·나경원·정우택·정진석·주호영(이상 4선) 의원 등 중진의원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검을 조기에 성사시키지 못한 원인을 한국당에만 돌릴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다당 체제 정착을 들고 나오며 새로운 대안 세력임을 자임했던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현재 지방선거 정국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실패하면서 야권 공조의 축으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검을 조기에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지 못한 것이다.
바른미래당은 지방선거가 임박한 5월 8일 기준으로 광역단체 17곳 중 절반이 넘는 8곳의 후보 공천을 아직 하지 못했다. 당의 간판이었던 안철수 전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로까지 나섰으나 바람은 아직 불지 못하고 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평화당 역시 지방선거에 나서려는 인물을 찾지 못하는 후보난을 겪는 가운데 야성(野性)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화당 안팎에서는 당의 위상이나 미래에 대해 자조적인 평가가 많다. 당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박지원 전 대표조차 최근 페이스북에서 “국민의당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훨씬 많은 법과 제도에 의한 개혁(을 이뤘을 것). 제 판단이 틀렸다. 후회된다”고 털어놨다.
결국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 야권 3당은 민주당이 독주하는 정국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을 이번 특검 도입을 둘러싼 줄다리기 과정에서 재확인했다. “이대로는 안되네”라는 목소리의 압력이 훨씬 커졌고, 6월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한 야권의 빅뱅 조짐이 표면화하고 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