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 ||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고 ‘폭로의 대목’인 국정감사철이 돌아왔다. 해마다 국정감사 때마다 대형 스캔들이 터지는 것은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정감사가 시작되자마자 야당은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북한에 거액의 뒷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산업은행에서 현대상선에 대출한 자금 중 4천억원이 행방불명되었고 이 돈은 필시 다른 루트를 통해 북한에 전달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하면 한 야당의원은 관계기관의 도청기록을 제시하며 아직도 고위층이 연루된 더 많은 도청증거를 갖고 있으며 앞으로 이를 차례차례 공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다보니 현 정권의 대북사업에 따른 의혹을 전담하는 야당의원들을 `‘나바론 특공대’로 부른다는 얘기도 나왔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특공대가 난공불락(難攻不落)이었던 나바론의 거포(巨砲)를 폭파하고 영국군을 구출한 사실에서 따온 별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바론 특공대’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실체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집권 민주당쪽에서는 야당의 폭로 시리즈를 두고`‘추리소설 백일장’이라고 비꼬았다. 전혀 근거없는 소문을 근거로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은 단독으로라도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당분간 의혹의 진실이 쉽게 밝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국정감사 기간에 제기되었던 의혹들 중에 사실로 밝혀져 사법처리된 것도 있지만 더러는 그야말로 여•야간의 정치공방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리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이 전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정부여당이 한사코 부인하고 있는 의혹이 진실일 수도 있다. 문제는 정권말기 때마다 그동안 묻혀있던 의혹들이 무더기로 터진다는 데에 있다.
더러는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극비사항’까지도 야당의 손에 넘어가 의혹이 증폭되고 뜨거운 정치쟁점으로 비화한다는 점이다. 정부•여당쪽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부안에 야당과 내통해서 주요 정보를 빼내주는 비선(秘線)조직이 있다고 의심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의 정권교체를 통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력한 대통령후보 진영에 줄을 대고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를 보아왔다.
지난 92년 대선 때도 김영삼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졌을 때 국가정보기관의 핵심 인물과 청와대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 김영삼 대통령 후보 캠프에 수시로 드나들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소문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 4주년을 맞아 각계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지금 레임덕이 오면 이는 정권이나 정부가 아닌 국가의 불행”이라며 정권말기의 권력누수 현상을 경계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레임덕을 걱정하던 그때부터 이미 권력누수는 시작되고 있었다. 고위 공직자들은 이미 다음 정권을 생각해서 요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국무총리 자리를 맡겨도 마다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권력누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임기는 이제 겨우 다섯 달을 남겨두고 있다. 국정감사는 끝나도 지난 5년 동안에 누적된 비리나 의혹이 터져나오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한 비리나 의혹을 야당이나 언론에 제공하는 인물은 정부 안의 불만세력일 수도 있고 `정의감에 불타는 ‘양심세력’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이 정부가 해야할 일은 정권 안에 있는 ‘배반자’를 색출해 내거나 추리소설이라고 무조건 부인하기보다는 먼저 그동안 제기된 의혹들을 말끔하게 털어내고 청산하는 일이다. 그것은 퇴임 뒤에 더 시끄러워지는 것을 예방하는 일이자 정권의 ‘유종의 미’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