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추향 수원대 교수 | ||
그렇다면 영성을 믿는 인디언들에게 ‘할아버지’는? 거기엔 젊음이 흉내낼 수 없는 지혜가 있다. 그들에게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헤매거나 생이 무거워 휘청거릴 때 마음을 가라앉혀 줌으로써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생의 어른이다. 리판족 인디언의 영적인 삶을 다룬 <할아버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네가 혼자 있을 때도 외롭지 않고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은 네 스스로가 네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네가 네 자신에게 편해지고 너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너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혼자 있을 때 ‘나’ 자신과 친구 할 수 있어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의 기운이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기운도 분명한 것이어서 ‘나’의 마음이 흩어짐 없이 편안해야 가까운 이에게 내미는 손이 단정하고 부드럽고 따뜻할 수 있다.
마음이 보이는 대로 끌려가고 들리는 대로 어수선해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왕 같은 권력이나 남산 만한 황금이 무슨 소용이랴. 그렇다면 그런 것들은 많을수록 위험한 흉기다.
지난 20세기, 과학문명에 탄성을 보내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일궈냈던 인류는 똑똑히 보았다. 더 많이 쌓아두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더 높아지는 것이 사람되는 것이 아니라고. 더 많이 버는 것이 자아를 안정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돈 없으면 안된다고, 돈, 돈, 돈 하는 사이 돈 없이 소통할 그 누구도 없이 돈만 부여잡고 있지는 않았는지.
직함을 떼고는 그 누구도 만날 일 없는 무표정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외로워지고 황폐해진 것이 어찌 인간뿐이랴! 맹목적으로 그러나 허겁지겁 모든 자연과 인간관계를 돈으로 바꾸느라 인간이 망친 지구 환경 시계는 “파멸 2시간55분 전, 매우 불안”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의 기후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너무나 짧아진 봄 그리고 가을, 게다가 8월의 장마가 웬일인가! 후텁지근해서 짜증으로 밤을 지새게 만드는 아열대의 여름은 왜 그리 길어졌는지. 우리뿐이 아니다. 세계 여기저기서 이상기후의 증후들을 걱정하고 있다.
1백 년 만의 홍수가, 60년의 가뭄이, 기상관측 사상 최대의 물난리가 왜 그리 자주 찾아오는지. 올해 강릉을 때린 기상관측사상 최대의 물난리가 내년 혹은 후년에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가 없다. 이제 ‘하나뿐인 지구’위의 생은 인간겣예?할 것 없이 너무나 절박하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을 살아있는 정신으로 대접하지 않고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함부로 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리처럼 혼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살아있어 느끼고 교류하는 존재라고 믿는 인디언들이 이 땅을 방문한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1백여km 떨어진 스톨로 원주민 나라에서 치할리스 밴드의 추장, 정신적 어머니, 강과 연어를 지키는 인디언들이 ‘매우 불안’한 새만금 갯벌을 방문한다. 백인의 침탈로 삶터인 자연을 잃고 상처 많은 생을 살았던 그들이어서인지 생명파괴에 민감하다.
갯벌은 바다의 자궁이다. 바다생물의 고향이다. 여의도 면적의 1백40배에 이르는 갯벌이, 그 갯벌에 몸을 푸는 억조창생의 생명들이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채 절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어렵게 찾아와 9월29일 오후 2시 새만금 바닷가에서 조용히 의례를 올릴 인디언들의 단순하고 강렬한 기원에 나도 간곡해진다.
대대적인 생명파괴 위에 이룩한 문명은 평화의 문명일 리 없다고, 생명으로 충만한 이들의 기도의 힘으로 개발의 미신, 개발의 주술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해달라고. 이 넓고 아름다운 갯벌에 가해지는 무지몽매한 폭력에서 바다를 구하고 갯벌을 구하고 생명들을 구함으로써 인간을 구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