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아니 추석이 눈앞이다. 일 많고 재난 또한 잦은 사회의 어지러운 일상을 뚫고 닥친 명절의 감회가 그래서 좀더 각별하다. 추석 전에 마침 금강산에서 이뤄진 제5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만남의 대표 사례로 꼽을 수도 있겠다. 어느덧 다섯 차례, 무슨 일에나 최초•처음을 중요시하는 언론은 예전보다 관심이 덜할망정 당사자들은 모두 50년 만의 만남이다.
서로 끌어안고 참담했던 세월을 대뜸 호곡으로 푸는 장면이 역시 눈에 아팠다. 단속적인 영상만으로 자세한 사정을 얼마나 알까마는, 여러 차례 겪으면서 느낀 것이 적지 않다. 개별적인 자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공개 석상에서 드러난 남북 간 만남의 방식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북쪽 혈육은 장군님의 은덕을 앞세우며 갖가지 훈장이라든가 졸업장 등을 언제나처럼 먼저 펴 보인다. 만남은 짧고 뿌리내린 그쪽 생활은 길기 때문이리라 믿는다. 이런 짐작은 하나같이 완벽한 그들의 북한 말씨와도 연관된다. 남한에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10대 중반을 넘어 서울을 비롯한 타지역으로 옮아 간 이는 50년 이상을 살았다 한들 소용없다. 전라도면 전라도, 경상도면 경상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의 언어 습관은 그만큼 단단한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사회의 다양성을 달리 들 수도 있다.
한데 20세를 전후하여 북에서 살기 시작한 상봉자들은 서울이나 충청도,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을 막론하고 북한 말씨에 다들 익숙했다. 월남한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분들이 원래의 말씨를 고스란히 지닌 것과 대조적이다. 그쪽 사회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사소한 일이다.
장차 육로로 오가는 길이 트이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생기면 그 이상 궁금한 것도 차츰 알게 될 가벼운 사안이다. 북측 언니가 자랑하는 훈장을 보고, 남측 동생이 ‘우리 언니 출세했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벌써 여유로워졌다. 피차 이질적 생활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남북교류의 폭을 넓히면 그만이다.
그와는 다른 각도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생이별한 부부들의 후일담이다. 남편은 재혼하고 아내는 청상으로 지낸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여자의 시계는 항상 남편이 실종되거나 헤어질 당시의 시간에 멈춰 있을 공산이 크다. 한 여인은 그때부터 ‘눈물을 밥 삼아’ 반세기를 살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봄 제4차 이산가족 상봉 때 본 정귀업 할머니가 곧 그 분이다. 52년 만에 해후한 남편에게 던진 첫마디가 “애인 안 데리고 왔재?”였다. “데리고 왔으면 썩어죽을 인간”이라고도 말했다. 자신의 그동안 일생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는 탄식 끝에, “지금도 못만났으면 넋새가 돼 울고 다닐 것”이라고 해서 ‘이산의 시인’ 소리를 들었다. 평생 동안 다지고 다진 그리움이 삶의 버팀목 구실을 한 셈이다.
전쟁이라든가 국가적 재난 앞에서 겉으로 연약하고 안으로 강한 여성의 그런 힘을 남자는 때때로 못 당한다. 아니 외면하기 쉽다. 말할 나위 없이 남북 이산가족의 절절한 소원은 헤어진 혈족과의 재회다. 결국은 그것도 함께 지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맞물려 있다.
추석을 당하여 더욱더 간절할 터이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갈 수 있는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고향을 찾는 민족대이동 풍속은 좀 그렇다. 이런 시가 있다. “저렇게도 고향이 없는가/역사에 대하여/우주에 대하여/고개 숙여 남부끄럽구나/ 얼마나 많은 곳에서 태어났던가/그대 지난날/얼마나 많은 곳에서 태어날 것인가/그대 맞이할 나날/고개 들어 달 바라보아라.”(고은/‘추석 전야’ 전문) 조상에 대한 경배도 좋지만, 온 집안이 모여 하루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고향이 따로 없는 세상에 전 국토를 자동차로 메우는 일이 지겨워서도 다른 방법을 찾을 때쯤 되었다.
신문은 신문대로 지역구에서 올라온 정치인들의 입을 빌려 ‘추석 민심’을 각 도별로 노래할 것이다. 자유당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IT선진국이 무색하다. 앉은 곳에서는 민심이 안 보이고 안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