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를 앞둔 담황색 벼논의 끝없는 전개가 호남평야의 축소판 같은 느낌으로 시원했다. 말로만 듣던 재령평야의 한 자락을 달린 셈인데, 들녘이 탁 트이기로는 동명왕릉을 오가며 본 원산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넓은 벌 평평한 땅에 식량난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케 할 만큼 평양 주변에는 높은 산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음 다음날 다다른 백두산 상상봉에서는 멍한 시간을 한참 보냈다. 십여 년 전 옌볜을 통해 오르려다 기상 악화로 초입에서 발길을 돌렸던 산이다. 의당 감동이 벅차 오를 법도 하련만 어리둥절한 기분이 앞섰다. 차에서 내린 지점이 곧 정상이었던 까닭일까. 어지간히 산을 싸댄 평생에 내 힘으로 단 한발도 떼지 않고 정상에 서기는 처음이다. 자동차 길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 삭도장치로 오르내리는 궤도차가 따로 보였다.
우습게도 뜨거운 감정이 멱에 차오르기 시작한 건 하산길 도중이었다. 바람마저 잔 행운을 기뻐하며 외포(畏怖)에 가까운 마음가짐으로 대했던 천지를 새삼 떠올렸다. 졸졸 흐르는, 북-중 국경을 가르는 압록강 상류 곁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백두산은 평양에서도 얼마나 먼 영산인가를 되새겼다.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 삼지연에 내렸다가 자동차로 다시 두 시간 가량 달려야 당도하는 곳이다. 정신없이 왔다가 정신없이 떠나는 죄스러움이 차라리 컸다.
MBC 북한 공연에 따른 참관단의 일원으로 처음 북녘땅을 밟았다. 5박6일을 그곳에서 지냈으면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을 텐데 고작 들과 산의 풍경화만 그린 모양이 좀 그렇다. 더구나 변화의 속도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고들 한다. 하지만 초행길엔 전과 후의 비교 기준이 만만찮아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과 비슷한 코스를 아직은 되밟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주마간산의 섣부른 견문으로 무엇을 얼마나 말하랴.
그럴 바에야 같아도 너무 같은, 차창 밖 농촌 풍물에 흠뻑 빠지는 것이 낫지 싶었다. 가다 보면 태어난 고향 마을이 여기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흡사한 정경에 아닌게 아니라 자주 떨었다. 성불사로 들놀이를 온 인민학교 꼬맹이들이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보고 꾸뻑 절을 하는 모습은 미안하고 애잔했다. 소매 없는 주황색 조끼를 입고 고속도로 보수원으로 나선 젊은 여성들은 수줍게 등을 돌리고, 밭일하는 농부(農婦)의 검게 탄 얼굴에 고단한 삶이 어려 있는 듯했다. 우리는 안 그런가.
농촌은 그렇다 치고 평양 시내는 여러가지 면에서 많이 변모했다는 것이 북한을 자주 드나든 사람들의 말이었다. 자전거 통행인이 부쩍 늘고 청량음료 등을 파는, 매대(賣臺)라는 이름의 간이 포장마차가 자꾸 생긴다. 적막했던 밤거리에 네온사인이 빛나고, 묘향산 같은 명승지에서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을 적잖이 만났다.모든 걸 눈으로 보고 짐작할 밖에 없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기가 여전히 어려운 탓이다. 호텔 옆이나 길 건너에 있는 ‘조개구이’집이라든가 ‘닭구이’ 가게에 들러 딱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사람 사는 곳에 그렇다고 예외가 아주 없을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면한 시민들은 서슴없이 즉석 대화에 응했다. 10차선 도로를 타고 당도한 남포시 서해갑문의 처녀 안내원은, 황해북도 은율에 사는 애인이 갑문 때문에 너무 자주 찾아와 성가실 정도라는 유머로 남쪽 손님들을 웃겼다. 8km에 달하는 서해갑문으로 은율이 육속됐다는 뜻이다.
요컨대 북한은 이미 벌여놓은 개방과, 그로 인한 어떤 두려움을 아울러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반세기 이상 닫혀 있던 사회를 여는 일에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터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북의 사정을 반드시 표면적인 변화 양상에서만 파악할 건 아니다. 노랑머리에 엘렉기타로 귀청이 떨어지도록 무대를 와장창 뒤흔든 윤도현밴드 공연 등을 90분이 넘게 생중계한 의미와 영향을, 거꾸로 요량할 수도 있다. 한 북측 안내원은 그걸 ‘혁명적인 일’이라고 했는데, 문화충격 운운 이전의 외래 문물 수용 태세 축적을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서로가 서로를 학습하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그런 측면에서 더욱 바란다.
최일남(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