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 홍보 대행사 관계자가 늘어놓은 넋두리다. 대부분의 홍보 대행사가 그렇지만 영화판은 크랭크인부터 개봉 후 상영이 내려갈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라고 했다. 개봉 전 긍정적인 반응으로 기대감을 올렸던 작품들이 배우는 물론, 제작진들까지 구설수에 오르면서 흥행은커녕 VOD로도 수익을 올리지 못한 선례들을 봐 온 탓이다.
스티븐 연이 인스타그램에서 욱일기를 입은 소년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 논란이 불거졌다. 사진=조 린치 감독 인스타그램
영화판이 이렇게 들쑤셔지고 있는 것은 5월 17일 개봉하는 영화 ‘버닝’에서 예상치 못한 논란이 불거진 탓이다. 주연을 맡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의 인스타그램 ‘욱일기 논란’이 터진 것. 스티븐 연은 인기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의 글렌 역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다.
그는 지난 12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욱일기가 새겨진 옷을 입은 아이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사진을 올린 인물은 조 린치 감독으로 스티븐 연과 함께 작품을 찍은 바 있다.
욱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구 일본 해군의 해군기로 사용된 깃발이며 한국에서는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함께 ‘전범기’로 불린다. 한국인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욱일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스티븐 연의 인스타그램에 비판글이 폭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국계 미국인인 그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도가 지나친 욕설 댓글도 줄을 이었다. 이에 스티븐 연은 곧바로 영문과 한글로 된 사과문을 올렸으나 이번에는 특히 영문 사과문의 뉘앙스와 내용이 문제가 됐다.
스티븐 연은 영문 사과문에서 “인터넷 속 우리들의 세상은 너무나도 취약하기에 이런 플랫폼(SNS)으로 하여금 우리를 완전히 대표하도록 한다. 그 점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는 말을 덧붙여 논란의 불씨를 키웠다. 이 문단은 그저 생각 없는 웹서핑에 불과한 자신의 행동을 두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비난을 맞닥뜨린 사실이 당황스러웠다는 이야기로 해석됐다.
한글 사과문에는 없는 이 문단에 대중들은 더욱 분노했다. “한국인들이 영어 해석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영어로만 추가로 변명한 것”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는 잠잠해질 줄 몰랐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스티븐 연은 결국 한글로만 된 2차 사과문을 올렸으나 여전히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영화 ‘버닝’은 ‘거장’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특히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영화로 크랭크인 전부터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기대작 ‘버닝’을 주춤하게 한 것은 비단 스티븐 연의 욱일기 사건만은 아니다. 이미 지난해 11월 또 다른 주연인 유아인의 이른바 ‘애호박 게이트’ 사건이 주로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혔었다.
‘애호박 게이트’는 유아인이 트위터에서 자신에 대해 “냉장고 안에 있는 애호박을 보며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 찡긋할 것 같다”고 언급한 트위터리안에게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긋)” 이라는 멘션을 달면서 시작된 논란이다. 이 멘션이 “남성의 무의식적인 폭력성을 함의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졸지에 유아인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설전이 벌어졌던 것. 유아인의 발언 가운데는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메갈 짓 이제 그만” “(성 관련) 피해를 입었다면 진단서를 끊고 가해자를 응징해라” 등이 문제가 돼 많은 여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서울소재 여대에서는 ‘버닝’ 포스터에서 유아인의 얼굴을 포스트잇 등으로 가리는 유행이 퍼지기도 했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이 때문에 서울 소재 일부 여대에서는 ‘버닝’ 영화 포스터 속 유아인의 사진에 ‘엥?’ ‘애호박’ ‘보지마!’ 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을 붙여 얼굴을 가렸다. 이런 행동이 여러 여대로 퍼져 유행을 타자 결국 해당 포스터는 철거되기까지 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힘들게 촬영 다 마치고 개봉 일자 받아서 홍보 일정 잡고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일반적으로 실제 사생활은 관리해도 ‘온라인’ 발언까지 일일이 검열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해 개봉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역시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논란이 불거져 흥행 실패의 이유로 꼽히기도 했다. 개봉 직후, 변성현 감독이 지난날 SNS를 통해 쏟아낸 지역·여성 차별, 대선 후보 비하 발언 등이 발굴돼 논란을 낳았던 것. 결국 변 감독이 “이 영화가 저의 부족함 때문에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간곡히 부탁드린다”라며 사과문을 올렸지만, 대중들 사이에서 “영화 ‘불한당’을 보지 말자”는 보이콧 정서가 퍼진 뒤였다. 결국 ‘불한당’은 2017년 칸 영화제 초청이라는 홍보 호재에도 불구하고 100만 관객을 넘지 못한 채 쓸쓸히 막을 내려야 했다.
앞선 영화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주연 배우나 감독처럼 영향력이 큰 사람뿐 아니라 조연들도 SNS 논란으로 잘못 걸리면 영화 자체에 바로 피해가 올 수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2014년 영화 ‘해무’의 경우 조연 배우 정대용이 세월호 희생자인 고 김유민 양의 아빠 김영오 씨의 단식 투쟁을 SNS를 통해 비난한 것이 큰 논란으로 불거졌다. 당시 일부 대중들은 ‘해무’ 관람 보이콧 행동에 나섰으며, 정대용이 SNS에 사과문과 은퇴 선언을 함으로써 일단락되기도 했다.
그는 “영화만 재미있으면 논란이 있더라도 입소문을 타고 흥행한다고 하지만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있는 논란이 있고 그럴 수 없는 논란이 있기 때문에 제작사나 홍보사 측은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어 “영화는 제작부터 개봉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제작진들의 노력도 그만큼 많이 들어간다. 한순간의 SNS 실수로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지 않도록 업계도 각별히 관리할 테니 이런 진정성을 대중들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