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동교동계라는 용어도 쓰지 말고 모임도 갖지 말라고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 사실상 해체지시를 내렸다. 퇴임 이후엔 국내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작정이니 더 이상 동교동계가 해야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교동계의 해체는 오히려 너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굳이 ‘공(功) 이룬자 떠난다’는 옛 중국의 사례(史例)를 들추지 않더라도 동교동계는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는 그날로 스스로 해체했어야 했다.
동교동계가 지난 40년 동안 온갖 박해와 탄압을 견디면서 투쟁해 온 것은 이 땅의 민주화요, 더 정직하게는 그들이 받들어 온 김대중의 집권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민주화과업을 달성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했다면 그동안 신산(辛酸)을 같이하며 추구해 온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동교동계는 해체를 선언했어야 했다. 그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던가. 막상 권력을 잡고 보니 선뜻 물러서기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가시밭길을 헤쳐나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어떻게 잡은 권력인데’ 하는 미련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좌장인 권노갑씨의 입장에선 그동안 신산을 같이해온 동지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이다. 자리를 원하는 사람에겐 자리를 마련해주고 자금이 필요한 사람에겐 이권을 알선해 주어야 한다는 한 계파의 보스로서의 책임감은 어쩌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동교동계의 좌장으로서 권노갑씨는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대리인 또는 정권의 제2인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국회의원 공천을 좌지우지하고, 공천 탈락자에겐 정부투자기관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권씨의 비공식적인 권력행사가 정풍파 의원들에겐 못마땅하게 비친 것이다. 당의 쇄신얘기가 나올 때마다 동교동계가 도마 위에 오른 것도 이 같은 보이지 않는 권력행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막후의 실력자’로 인사에 관여하고 이권을 나누어주다 보니 결과적으로 DJ정권의 편중인사에 대한 책임을 동교동계가 뒤집어쓰게 되었고 더러는 이권에 개입한 것이 드러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정권재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특정후보를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밀어주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했으나 이인제 후보를 밀었던 동교동계는 사실상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셈이다.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 단일화되기까지의 몇 달 동안 사사건건 노 후보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오히려 동교동계가 아니었던가.
지난 40여 년간의 투쟁을 통해 어렵게 권력을 잡았으니 이젠 우리도 그 권력의 단맛을 누려야겠다는 욕심에다 동교동계가 미는 인물을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지나친 야심이 결국 그동안 쌓아온 민주화에 대한 빛나는 업적과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결과가 되고 말았다.
동교동계가 좀더 일찍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이제 우리의 역할은 끝났다’며 스스로 해체를 선언했더라면 대통령이 나서서 해체를 지시하는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 물러나 자신을 지키는 ‘퇴이자수’(退而自守)의 슬기가 아쉬웠다는 얘기다.
동교동계가 해체되면서 앞으로 우리 정치에서도 계보정치의 시대는 끝났다는 성급한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정치개혁이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공약(空約)이나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나고 후진적인 정치시스템이 혁파되지 않는 한 계보정치는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유력한 정치인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몰리게 되고 사람이 몰리다 보면 달무리처럼 계보가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첫걸음은 무엇보다 대통령이 학맥과 지연, 그리고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한 사람들과 그 계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