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김혜린의 ‘불의 검’ 중에서
왕처럼 당당한 싸움이 있고 사기꾼처럼 비겁한 싸움이 있다. 왕이 지켜야 하는 그 많은 시선들은 동시에 왕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동안 우리 선수들은 왕처럼 당당하게 악마처럼 집요하게 싸웠고, 그들을 보는 우리는 붉은색처럼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그들은 우리의 자랑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힘이었다. 그들과 우리는 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축구 강대국 포르투갈을, 이탈리아를, 스페인을 이겼을 때는 환호했고, 독일에, 터키에 졌을 때는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이었고 “아리랑”이었으므로.
히딩크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히딩크식 해법이 관심을 모은다. 학연·혈연·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을 중시하는 그의 용병술이 통한 거란다. 하긴 네덜란드인인 그에게 무슨 학연이 있고 혈연이 있고 지연이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히딩크가 기초체력 보강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전·후반을 뛰어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선수들의 체력은 이탈리아전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축구에도 인격이 있는 건가. 거칠고 냉소적이고 위협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탈리아 선수들과 당당하게 몸싸움을 하는 우리는 진지하고 성실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채식 위주의 우리 식단을 가지고는 육식을 하는 서양 사람들의 체력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던 어떤 체념적 비관주의가. 그 체념적 비관주의를 ‘훈련’으로 넘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는 서구 콤플렉스, 백인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 아닐까. “pride of Asia”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국제상업주의적 성격이 강한 월드컵을, 서양의 선수들은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란다. 그렇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스포츠정신에 입각해서 순수하게 남김없이 그 자체에 몰입하면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 수사에 뛰어난 히딩크가 말한다. 우리 선수들은 착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이라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민족성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과도 축구 얘기로 웃을 수 있고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손에 손잡고 선수들을 응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먹은 맘 없이, 이해관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민족이 우리였다. 우리에게 그런 민족성이 있구나, 하는 사실이 그렇게 새록새록 할 수가 없고, 우리에게 응원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대표가 있구나, 하는 사실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기분 좋은 힘’을 잊고 있었는가? 흥이 나면 뭐든 하는 우리의 에너지를 왜 몰랐을까? 아니, 우리 에너지가 분출된 적은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동학으로, 3·1운동으로, 4·19혁명으로, 6·10항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분출했다. 불행한 우리의 억압의 역사는 그에 대항하는 저항적인 힘으로만 우리를 모았다. 너무나 무겁고 진지하기만 했다.
이런 기분 좋은 힘으로 하나 된 적이 없어 한편에서는 국수적 성향이 강한 배타적 민족주의 아니냐고 걱정하는 모양이다. 자신감이 붙은 우리 팀을, 원초적인 힘을 겨루는 우리 식구를 응원하는 것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일 수 없다. 그러니 그렇게 보이면 안된다. 그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 축제는 그동안 주눅들어 예속적이기까지 했던 대외관계를 청산할 힘을 주었고, 우리도 국제사회의 당당한 성원이라는 걸 세계에 알렸다. 그에 걸맞게 우리도 변해야 한다.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평가되는 인권 생명 환경 평화 등의 문제를 인류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이 도시들은 그동안 정치적인 지역 보스들이 지역감정의 거점으로 활용해왔던 도시들이었다. ‘너’ 속에서 미움을 보고 분노를 부추기는 지역감정이 아니라 너와 나는, 동과 서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신명 속에서 확인하는 축제가 아니었나! 대전에서 붉은 악마가 “Again 1966”이라고 썼을 때의 느낌이란!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른 그때를 기억하는 젊은이들은 분명히 희망이었다. 그 희망의 싹에서 동과 서가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남과 북이 서로를 품는 상생의 꽃이 피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