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상 고려대 교수 | ||
이미 로또 열풍의 부작용과 폐해가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근로자들이 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것은 물론 당첨만 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카드빚을 얻어 몇 백만원어치씩 복권을 사며 가정불화를 자초하는 복권중독자까지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법적으로 복권매입이 금지된 초중생들까지도 책가방을 맨 채 줄을 서고 있다. 땀 흘려 돈을 벌고 뜻있게 써야 한다는 기본적 가치관을 배우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 한탕주의부터 가르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도박을 좋아했다. 일년 내 땀을 흘려 농사를 짓고 나서 겨울이면 사랑방에 모여 쌀 가마를 놓고 도박판을 벌인다. 가족의 울부짖음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급기야 농사지은 것 다 털리고는 월 일할이 넘는 장려빚을 얻어 생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도박성향은 경제성장과정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는 증권시장을 보면 여실하다. 증권시장은 기업이 발행한 증권의 거래를 통해서 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가들은 재산을 증식시키는 시장경제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그렇다면 장기적 안목에서 기업의 수익성과 전망에 따라 건전한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발전을 하고 투자가들은 기업이 만드는 이익을 공평하게 배분 받아 잘 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증권시장에서 기업들은 가짜장부를 만들고 허위정보를 유포해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기관투자가와 큰손들이 허위주문을 내서 주가를 조작하고 초단기 매매를 하며 폭리를 취하는 경우도 흔하다. 결국 온 국민이 피땀 흘려서 이루어 놓은 경제를 놓고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선대들이 쌀 가마니를 놓고 서로 속이며 도박판을 벌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부동산시장을 보면 투기의 나라라는 것이 확연하다. 땅은 국민 모두가 함께 소유하며 살아야 하는 조상들의 소중한 유산이다. 경제성장이 본격화하면서 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까 일단 땅만 잡으면 돈을 벌게 되어 전 국토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도박이나 투기의 속성은 부자가 이득을 얻는 것이다. 결국 전국의 토지의 대부분을 부유층이 차지하는 결과가 빚어지며 서민들은 평생 땀을 흘려도 내집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증권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 투기거래가 극성을 부리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진 서민들은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한 가닥 희망만 보이면 무조건 사행행위에 참여하는 습성이 생겼다. 최근 증권시장에 예측이 맞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선물시장과 옵션시장이 도입되었다.
이 시장에 투기거래가 폭증하여 거래규모가 세계 1위까지 올랐다. 실로 가공할 사행성 투자행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강원도 탄광촌의 카지노판을 휩쓸고 급기야 로또복권에까지 열풍을 일으킨 것이다.
시장경제의 본연의 모습은 결코 이것이 아니다. 안정적인 시장기반 위에 누구나 땀 흘린 만큼 소득을 버는 공평한 경제가 참 모습이다. 이런 견지에서 경제가 도박과 투기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건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제도와 의식 선진화가 절실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만신창이다. 무자비한 구조조정으로 20대와 50대의 실업이 심각하다. 오로지 일만 알고 고속성장을 주도해온 50대는 한순간 억울한 퇴출을 당했다. 죽어라 공부를 하고 사회 첫발을 내딛는 20대는 당장 돈벌이를 못한다는 이유로 아예 기회조차 없다. 어렵게 직장을 가지고 있는 30대, 40대도 절반 이상이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다. 이 가운데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소득격차가 날로 커지고 사회갈등은 고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집단적 절망과 분노를 자아내는 복권사기극이 계속될 경우 사회적 불안의 확산이 우려된다. 정부는 무모한 복권사업을 중단하고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걷어 사회상처를 치유하는 재정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계층에게 복권 대신 안정적인 일자리와 희망을 줄 수 있도록 경제구조를 뜯어 고쳐야 한다.
참여복지사회를 강조하는 노무현 정부는 복권 열풍이 시사하는 교훈을 깊이 새겨 국민 모두에게 안정과 희망을 주는 경제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