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하노이 출생인 호앙 투 링은 틴에이저 시절부터 각광 받던 엔터테이너였다. 한때 ‘티엔 턴’(천사)이라는 걸 그룹의 멤버였던 투 링은 2006년 ‘학생의 꽃’이라는 뜻인 유명한 10대 잡지 ‘호아 홉 초’의 콘테스트에 1등으로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앞세운 투 링은 하노이TV의 아동 대상 게임 쇼 사회자가 되었고 수많은 CF에 출연했으며 학생 잡지 표지 모델로도 유명해졌다.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투 링은 배우 활동을 했다. 첫 작품은 16살 때 출연한 TV 드라마 ‘인생 길’(2004). 이 작품으로 얼굴을 알린 후 ‘인생의 웃음’(2005) ‘태양으로의 여행’(2006) 등에 출연하며 서서히 상승세를 맞이하던 투 링은 콘테스트 입상 후 엔터테이너로서 만개한 셈. 2006년엔 베트남영화학교에 연출 전공으로 입학하며, 20대 이후의 삶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나이였지만 호앙 투 링은 많은 것을 이루었고, 말 그대로 전도유망한 당시 최고의 신인이었다.
2007년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본 것. 먼저 드라마 한 편이 왔다. 그녀가 주인공을 맡은 ‘방 안의 일기’는 ‘꾀꼬리’라는 뜻인 ‘방 안’(Vang Ahn)이라는 이름의 여고생의 일상을 그린 시트콤이었다. 이 TV쇼는 틴에이저뿐만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교육적 내용 때문이었다. ‘방 안의 일기’에 나오는 고등학생들은 모두 재능 있고 예쁘고 예의 바른 ‘이상적인 10대’들이었고, 호앙 투 링은 이러한 바람직한 청소년의 전형을 연기하며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2007년 9월, 지옥 같은 현실이 시작된다. 투 링과 남자친구 사이의 섹스 비디오가 인터넷을 통해 유출된 것. 모바일 폰으로 찍은 것으로, 남자친구는 그 영상을 자신의 노트북에 다운로드했는데 깜빡 잊고 그 노트북을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빌려간 사람은 노트북에서 그 영상을 발견한 후 몰래 파일을 복제했고 그런 경로로 처음엔 대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유통되었다. 하지만 한 여학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클립을 올리면서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베트남 엔터테인먼트 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불린 이른바 ‘방 안 스캔들’은 이후 국경을 넘어 미국과 영국의 미디어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고, 미국의 유명 블로거 페레즈 힐튼이 언급하면서 세계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급기야 베트남 총리는 ‘방 안의 일기’의 방송사인 국영방송 베트남TV를 강하게 문책했고, 결국 2007년 9월 14일에 시트콤은 중단되었다. 마지막 방송엔 호앙 투 링이 직접 나와 눈물의 사과를 해야 했다. “저는 엄청나게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의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과 팬들과 시청자 여러분께 사죄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동영상 유출에 관련 있는 네 명의 대학생은 구속되었다.
보수적 사회였던 만큼,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호앙 투 링이 절대로 재기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패리스 힐튼이나 킴 카다시안이 섹스 동영상 유출 후에도 그다지 타격을 입지 않긴 했지만, 그건 21세기의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베트남에선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3년의 침묵 끝에 투 링은 ‘호앙 투 링 vol. 1’이라는 앨범을 들고 가수가 되어 돌아왔다. 아무래도 대중의 반응이 두려웠기에 거의 프로모션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평단과 저널도 호앙 투 링이 지닌 가수로서의 재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댄스 팝 스타일의 음악과 함께 돌아온 그녀는 과거의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섹시 콘셉트를 선택했는데 이 전략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데뷔 앨범 이후 그녀는 패션쇼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과 CF 등에서 폭발적인 수요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불운과 나쁜 평판을 딛고, 이것을 오히려 성공의 발판과 기회로 삼은 호앙 투 링의 사례는 베트남의 엔터테인먼트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이미지를 보수적으로 억제해온 여성 연예인들이 섹슈얼한 이미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며 베트남 사회의 윤리적 엄숙주의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 그런 면에서 호앙 투 링의 스캔들은 결과적으로 연예 산업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계기였고,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