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사전에 그린 밑그림이랄지 그동안 전해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로 정책의 기본 방향은 어지간히들 짐작하는 편이다. 이미 제시된 각계각층의 숱한 기대와 희망사항이 차고넘치기 때문에도 지금은 차분히 지켜보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막 항구를 떠난 배가 제 속력을 내기 시작할 때까지는….
그만한 요량의 여유를 틈타 전직 대통령들의 생활을 대신 떠올린다. 엉뚱하다면 엉뚱하다. 새 대통령의 등장과 더불어 전개될 미래 지향의 시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민사회로 되돌아간 이들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한 번쯤은 조용히 짚어볼 문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합세로 여염의 시민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퇴역 대통령이 어느새 다섯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야 막설하기로 하자.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다섯손가락에 이른 것은 처음인데, 마지막이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다. 신임 대통령에 대한 경축이 있으면 떠나는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도 커야 마땅하거늘 여태껏 그런 감동을 공유하지 못했다. 수고했다는 박수소리와 콧등 시큰한 ‘올드랭사인’을 들은 적 없다.
어째서 그랬는가를 따진다든가 이유는 캐어 무엇하리. 좌절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정치적 귀결이나 불문율을 매번 실감시켰다. 당사자의 쇠락에 그치지 않는 국민의 불행이었다. 한결같이 그렇게 보낸 세월의 꼭지점에 늘 대통령이 있었다.
이땅의 대통령은 비단 시책의 잘잘못만으로 평가되지도 않았다. 어떤 성깔의 대통령 밑에서 살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정서나 의식 구조마저 영향을 받았다. 그만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알게 모르게 번지고 배어 시대 시대의 총체적 특성으로 굳어간 혐의가 짙다. 심지어 60년대 초에서 80년대 중반 어름까지는 목숨조차 걸어야 했다.
그러므로 민주화를 구가하고 삶의 격식이 제법 여유로워진 다음엔 대통령을 지낸 이들의 ‘대통령 이후’도, 한다한 나라의 그들처럼 귀거래(歸去來) 길이 아름다웠으면 싶었다. 환송하는 국민들의 존경 속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소일거리를 찾으면 좀 좋을까 희망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손바닥만한 국토의 어디에 터를 잡은들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마는 모조리 서울에 모여 사는 모양부터가 좀 멋적다. 한번 대통령은 영원한 대통령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바깥 출입을 할 때마다 수십명씩 수하를 몰고 다녔다. 정치가 지겹지도 않은지 비공식 대변인까지 두고 ‘안방정치’ 차원의 훈수를 두었다. 언젠가는 전직 대통령끼리 ‘주막강아지’ ‘골목강아지’ 따위 입싸움을 벌였다.
대통령을 물러나자마자 ‘두번째 감옥(대통령직)을 벗어나 기쁘다’고 했던 넬슨 만델라를 기억한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의 지방의회의원을 거쳐 의장이 되었던 지스카르 테스탱 생각이 난다. 백악관을 하직한 첫날부터 비행기와 경호원을 물리치고 야간열차를 이용한 트루먼은 어떤가. 그뒤에도 그는 생계에 쪼들려 두 권짜리 회고록을 썼다. 미국 대통령 회고록의 효시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은 다 훌륭하고 내 나라 대통령은 그만 못하다는 구설이 하도 많은 터에 실상 부질없는 얘기다. 미국 대통령 중에도 용렬한 사람 또한 많았다고 듣는다. 카터의 눈부신 평화활동을 다시 들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미국이라는 배경 덕이 크다. 아무나 흉내낼 일이 못되는 것이다.
은퇴한 대통령이 여생을 어떻게 살고 보내든 옆에서 관여할 바 아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5년마다 생길 전직 대통령의 거동이 앞으로는 한층 사람들의 이목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신선한 느낌이나 실망이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아니 출발점에 선 순간부터 5년 후를 겨냥하고 나가면 더더욱 좋을 듯하다.
그런 대통령만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길이길이 남으리라는 걸 굳게 굳게 믿는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수월찮을 망정 적어도 마음 가짐은 그래서 나쁠 것 없다. 함석헌 선생은 ‘종(終)이 시(始)를 낳는다’고 일찍 갈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