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일이 잘 되느라고 네댓새 터울로 태극전사들이 승전고를 울려 축제 분위기를 한 단계씩 더 돋운 셈이다. 연전연승의 기쁨에 겨워 뒤늦게 하는 소리지만 16강의 한을 푼 시점에서 일단 만족하려 했다.
입으로는 내친 김에 8강까지 가자고 기를 쓸망정 마음 한구석엔 절반의 성공도 어디냐는 자위가 깔려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데 웬걸이었다. 8강을 거뜬히 넘어 4강 대열에 당당히 오르자 FIFA컵에 입맞출 홍명보 주장을 상상하는 욕망의 업그레이드에 또 다시 즐겁게 떨었다.
한국팀은 선수가 열두 명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운동장 관객은 물론 도시와 광장의 붉은악마를 하나로 합쳐 열두 번째 선수라 일컫거늘, 그들의 지향과 목표가 한결같다는 점에서 5백만, 아니 4천7백만의 원군을 통틀어 하나로 묶는 시각에 국내외가 어지간히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열외의 하나’가 음으로 양으로 끼친 총체적 영향과 의미는 그보다 몇 곱절 거창하고 복합적이다. 홈팀이 갖는 어드밴티지 이상의 문화적 충격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놀랍다.
누가 시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니할 말로 돈이 생긴단들 그토록 지극 정성을 다해 모일까. 자연발생적으로 찾아가 목청껏 성원하며, 순간 순간 가슴을 졸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겉과 속의 순도가 백퍼센트를 넘었다. 숱한 집회와 대군중의 소용돌이를 보고 늙은 자의 별난 경험으로 뜨겁게 말할 수 있다. 역사의 현장이 따로 있나. 이게 바로 역사의 현장이지 싶기도 했다.
일말의 노파심이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 아니다. 하나로 뭉친 힘의 역기능 내지 위험성을 생각한 탓인데, 이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일시적 냄비 근성이다. 모처럼 이룩한 영호남도 없고 무엇도 없는 크나큰 ‘거사’ 정신을 냄비 아닌 징소리의 긴 여운으로 은은히, 앞으로의 일상에 잘 녹여야 할텐데…. 그런 염원이 실로 절절하다. 언제는 경계의 대상이었던 붉은 색이 환희와 단합의 상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확인한 일체감이 그만한 소망의 한 결과물로 이미 보편성을 획득해 자랑스럽다만.
월드컵도 며칠 뒤로 파장이다. 모든 잔치의 뒤끝은 어차피 허망하다.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우리 모두다 돌아가는 사람들’(서정주)인 까닭에 다들 본래의 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광란’ 이후의 허탈감을 접고 빨리 자기 생활로 복귀하도록 이를 필요조차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나’ 소리가 절로 새나오는지 모른다. 그 말 속에도 월드컵을 통해 얻은 여러가지 긍정적 현상이나 미덕을 일회용으로 그냥 흘려보내기 아깝다는 뜻이 담겨 있는 줄 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히딩크’의 거취는 어떻게 될까. 선수들이 골을 넣을 적마다 해대던 ‘어퍼컷 팔짓’을 계속 보고 싶은데 본인은 정작 말이 없다. ‘떠나지마’ 노래를 준비하는 그룹도 있다던데 월드컵 폐막과 동시에 어디론가 떠날지, 행복한 인연을 더 연장할지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선택은 그의 것이다.
한국인들이 당신을 영웅시한다는 말에 ‘나는 축구 감독일 뿐’이라고 답변한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역시 히딩크는 히딩크구나 여겼다. 자기 직능에만 철저한 프로 기질이 듣기에 퍽 신선했다.
최근에 출간된 <세계가 놀란 히딩크의 힘>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이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이에 화답을 하듯 한국팀의 든든한 리베로 홍명보는, <홍명보·나카타 투게더>라는 책에 또 이렇게 썼다. “히딩크는 자신의 방법론을 무리하게 선수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알아듣도록 계속 설득합니다. …일정한 규칙만 지키면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시하는 감독입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제간의 믿음으로 읽힌다. 그만한 마음가짐으로 뭉친 선수들의 발끝에서 어찌 멋진 골이 나오지 않고 배기랴. 그런 히딩크를 따뜻하게 가슴에 담는 것으로 월드컵 종장을 닫고 싶다. 그 역시 그걸 제일 좋아할 것 같다. 히딩크와 대한민국 만만세다. 모두모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