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에 대해 경찰청이 진상조사 TF를 꾸려 재조사를 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사건은 2004년 6월 대학원생 양 아무개 씨(29)가 방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벌어진다. 양 씨가 여동생의 권유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단역배우였다. 양 씨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지방을 오가며 다양한 드라마 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과정에서 단역배우 용역업체 관계자 10여 명으로부터 4개월에 걸쳐 성추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 양 씨의 어머니는 “딸을 최초로 성폭행한 사람이 정신이 피폐해진 딸의 상태를 이용해, 그의 동료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성폭행해도 되게끔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 피의자도 재조사 촉구 왜?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12명 중 4명은 강간, 나머지 8명은 강제추행 등의 혐의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같은 보조출연자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최초 고소장에는 10명이 지목됐고, 이후 2명이 추가로 고소됐다. 강간 혐의를 받은 4명 중 3명은 성관계 사실을 인정했고, 나머지 한 명은 성관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지목된 가해자가 12명인 데다 각각 범행 혐의가 여러 건이 있어 수사 분량이 방대할 수밖에 없다. 1년 7개월가량 경찰수사가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장기화된 수사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일요신문은 재조사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당시 피의자 2명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고소장에 따르면 강제추행 혐의 피의자 A 씨는 2004년 10월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여의도로 이동하는 중 차량 안에서 양 씨를 성추행한 혐의와 다음날 워커힐호텔 연회장 촬영을 하던 중 양 씨를 수차례 성추행하고 창고에 가두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A 씨는 “나는 재수사를 원한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경찰로부터 모욕을 겪고 범인 취급을 받았다”며 “14년 전 사건에 대한 무죄를 아직도 인정받지 못하니 차라리 재수사를 통해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당시 호감을 가진 여성이 차에 같이 탑승해있었기 때문에 양 씨에 대해서는 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 5명이 같이 이동 중인 차량에서 대놓고 성추행을 하는 게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결국 여러 명이 있는 공간에서 한 여성을 성추행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2005년 수사 당시 경찰은 양측 진술을 듣고 대질신문 등의 방식으로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범죄 발생 당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따로 조사하거나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A 씨의 경우 당시 담당 수사관은 차량에 동승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지 않았다. 또 감금 장소로 지목된 워커힐호텔의 창고에 대해서는 경찰이 호텔 측에 전화해 “연회장 근처에 창고가 있냐”라고 묻는 것으로 수사를 마쳤다.
나머지 피의자에 대해서도 경찰은 최소한의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경찰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진상조사 TF팀도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조사에 협조할 의무가 없어 이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만 자발적으로 나서 재조사를 받았다. 사건의 최초 가해자로 지목돼 강간 혐의를 받은 B 씨는 성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경찰의 진상조사 재조사 요청도 거부했다.
# 강간 혐의 4명 모두 “서로 좋아서 만났다”
강간 혐의를 받는 4명은 단역배우 용역업체의 동료들이다. 진행반장, 보조반장 등 직책을 맡고 있던 이들 가운데 3명은 성관계 사실을 인정했으나 한 명은 성관계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네 명 모두 양 씨와 “교제를 목적으로 만나거나 호감을 갖고 사귀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직장 동료 4명이 한 여성을 만나며 사랑을 느꼈지만, 이들이 모두 한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서로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양 씨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2004년 10월 18일 C 씨, 19·24일 D 씨, 25일 E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열흘 동안 3명으로부터 네 차례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 D 씨는 양 씨와 교제하는 사이라고 주장했고, E 씨는 유부남이지만 양 씨와 서로 호감을 느껴 만났다고 주장했다. 직장 동료인 이들이 한 여자를 두고 하루 걸러 만나며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결국 양 씨가 한 번에 여러 명과 교제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양 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조용하고 내성적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대비되는 주장이다.
2004년 당시 양 씨와 함께 보조출연 일을 했던 여성은 “양 씨는 물론 네 명 중 2명의 반장과 같이 일을 해봤다. 양 씨는 조용하지만 잘 웃고 밝은 사람이었다”며 “양 씨가 반장 여럿과 동시에 사귀었다고 보는 건 상식 밖의 일이라 이상하긴 하다”고 말했다.
양 씨의 어머니는 “딸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10월부터는 상태가 악화돼 계속 치료를 받는 상태였는데, 이런 애를 불러내 연애를 했다는 게 말이 되냐”고 토로했다. 이런 점 때문에 직장 동료들 사이에 양 씨를 성폭행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나 동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로 양 씨는 단역배우 일을 시작하며 스트레스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2004년 5월 가벼운 신경증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양 씨는 9월 감정조절이 힘든 불안증세를 보였고, 상태는 점점 악화돼 12월에는 국립서울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법원의 증인신문조서에 따르면 양 씨의 주치의는 “5월과 9월 사이 환자가 갑작스러운 외부 스트레스로 정신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치료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D 씨는 “평범한 연인으로 양 씨와 교제했고 특별히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양 씨가 어느 날 울면서 다른 반장들과 성관계가 있었다고 말해줘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의 재조사가 시작된 가운데 어떤 진상이 드러날지 관심이 주목된다. JTBC 방송 프로그램 캡처
# 수사는 어떻게 이뤄졌나
영등포경찰서는 경제5팀에 성폭력 사건 수사를 맡겼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민원으로 담당 수사관이 세 차례 바뀌었다. 장장 1년 7개월 동안 4명의 수사관을 거쳐 이뤄진 경찰 조사기록을 살펴보면 양 씨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반복해서 진술했다.
- 진술인은 피의자가 평소 신체를 만지는 데 거절하지는 않았나요? - 촬영지 숙소 평상에 고소인을 눕혔을 때 어떻게 반항을 했나요? -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 않았나요? - 또 다른 범행장소에서는 피해자도 술이 깬 상태 아니었나요? 어떻게 반항했나요? - 강제로 당했다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 범행장소인 여관에 강제로 끌려갔다면 여관 주인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요? - 처음 강간을 당했다면 여관방에는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끌려가지 않아야 되고 또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나요? |
자매의 어머니는 “범죄자보다도 내 딸을 죽인 것은 경찰”이라며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찾은 경찰서에서 담당 수사관이 ‘이거 사건 안된다’며 화를 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대질신문 과정에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받을 수 있음에도 가해자들의 웃음소리가 훤히 들리는 환경에서 수사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은 양 씨의 진료기록에서 드러났다. 의무기록에는 ‘진술하고 나서 3일간 울었다’ ‘진술하고 나면 3~4일간 힘들다’ ‘진술이 반 정도 남았다. 피의자들 얼굴을 보니 힘들다’ 등 그녀가 조사 과정에서 겪은 심적 스트레스가 기록돼 있다.
경찰 한 관계자는 “수사 도중 수사관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 중 일부는 수사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하지만 일부는 수사 경력이 짧아 수사력이 부족했을 것”이라며 “수사기관에서 애초에 수사를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까지 사안이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남는 의문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양 씨가 목숨을 저버리면서까지 힘겨운 싸움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이 대답하지 못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유명하거나 부유한 상황이 아니기에 양 씨가 다른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무고를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각자 무죄를 주장하는 당시 피의자들에게, 그렇다면 평범한 대학원생이던 양 씨가 위법행위가 없는 사람 12명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하고 고통을 겪다 스스로 목숨까지 저버린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질문했다.
A 씨는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해서 사건에 대해 어머니가 아직까지 호소를 하는 것이겠죠”라며 “12명 중에 실제로 죄가 없는데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도 있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 씨가 첫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하고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B 씨는 “나를 제일 먼저 만나서 그랬을 것(나를 콕 집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양 씨와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는 D 씨는 “나는 평범한 연인관계로 교제했을 뿐이다. 다만 양 씨와 어머니가 14년 전부터 이렇게까지 싸워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