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내 속에 문장이 될 수 없는 원초적 함성들이 뭐 그렇게 많았는가. 나는 야수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에 매혹되었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에 긴장했으며, 순간 순간 아찔했고, 자꾸 눈물을 흘렸고 자주 웃었다.
그 감동은 개막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 작고 가난한 나라, 세네갈이 세계 최강의 프랑스를 이기다니, 순간 정체 모를 희망이 전율이 되어 온몸을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건 뭐였을까? 왜 내 마음은 어처구니없이 허탈해할 프랑스인을 느끼지 못하고, 아직도 주술사가 힘을 갖는 저 원시의 나라로 쏠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마치 내 전생을 거기에 두고 온 것처럼 꼭, 세네갈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라앉히느라 심호흡을 했다. 아득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 아득한 현기증은 우리와 포르투갈이 싸우고 있을 때 또 찾아왔다. 그런데 그 현기증은 포르투갈과의 싸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약팀 폴란드가 미국을 이기고 있다는 소식에서 왔다. 아, 폴란드! 나는 채널을 돌려가면서 폴란드를 응원했다. 그런데 나만이 아니었다. 벌써 대전운동장에는 인천경기를 뒤로 한 채 붉은 악마들이 폴란드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 저것이 바로 축제구나!
폴란드가 미국을 이기다니! 정말 공은 둥글었고 예측들은 보기좋게 어긋났다. 포르투갈에 완패하고, 우리에 완패한 폴란드가, 더 이상 “16강”이라는 희망의 말을 거머쥘 수 없는 폴란드가 무슨 힘으로 미국을 이기는가! 그런데 폴란드는 미국을 이기고 있었고, 나는, 우리는 폴란드의 공이 미국의 수비를 뚫고 그물망에 꽂힐 때마다 폴란드와 하나되어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시 포르투갈과 우리의 싸움! 축구를 아는 사람들은 이기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경기는 시작되었고, 내용은 완벽했다. 선수들의 열정과 정신력이 그대로 녹아나는 경기였다. 그리고 터진 박지성의 골! 그것은 자유로운 춤이었고 노래였다. 그 밤은 감동의 노래 “대∼한민국”으로 잠들 수 없는 밤이기도 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 건 뭘까? 후반전, 후반으로 갈수록 나도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대서양의 창, 포르투갈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 우리의 한(恨)을 닮은 노래, 포르투갈의 파두가 생각나는 것인지.
나는 우리 때문에 미국이 16강에 오르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기왕이면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과 함께 16강 대열에 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포르투갈의 탈락을 아쉬워했다. 왜 나는, 우리는 프랑스를 이긴 세네갈에 박수를 치고, 미국을 이긴 폴란드가 통쾌하고, 미국보다는 포르투갈을 응원했는가. 왜 터키를 응원하는 데는 그렇게 넉넉했던 우리가 미국에는 그렇게 빡빡한가? 그것은 강자에 대한 단순한 피해의식이었을까?
역사를 통해 물리도록 많이 봐왔다. 세상을 의심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순진한 백성들이 자본과 기술과 총과 칼로 무장한 제국주의적 폭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고, 당신과 우리는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주인과 노예인 것이 아니라, 때로는 툭탁툭탁 다툴지라도 손에 손잡고 살아야 하는 친구인 거라고.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이 프랑스를 이긴 게 통쾌하고, 작은 폴란드가 팍스아메리카나의 미국을 이겨주는 것이 통쾌했던 모양이다.
미국 대사관측은 우리의 역사 유적지 덕수궁 근처 문화재 보호구역에 8층짜리 대사관 직원숙소를 건립한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미국 대사관의 요구에 따라 현행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을 개정하려 한다고 한다. 이 무슨 오만에, 이 무슨 저자세인가. 세계적 지도국가의 위상에 걸맞은 도덕성 없이 이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는 한, 저항은 필연적이다. 더구나 부당한 힘 앞에 쩔쩔매는 정권이 인기있을 리 없다. “대∼한민국, 필승 코리아”는 바로 오만에 대항하는 힘의 승리를 기원하는 집단무의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