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당신은 찬란한 부활을 믿는가. 그런데 재미있다. 찬란한 부활 사건이 고통스런 죽음 사건에서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슬프고 지치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기쁘고 가뿐하고 환희에 찬 부활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죽음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둘이 아니라고. 예수는 부활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의 행태는 이미 부활을 잉태한 부활의 삶이었다고. 그리하여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까지 생명나무로 바꿔놓은 거라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것이 기대된 예수, 그러나 그 기대를 저버린 예수를 유대인들은 두고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처벌하러 왔다. 예수를 지키기 위해 한 제자가 칼을 들었다. 그 때 예수가 말했다.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고. 그러니 칼을 접으라고.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강의실에서의 우아한 가르침이 아니라 칼로 예수를 지키고자 하는 제자를 향해 던진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살인하고 싶은 마음도 자기성찰로 바꿔내는 예수의 마음 속에 이미 부활이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세력이 일으킨 전쟁을 두고 부활의 예수는 무엇이라고 할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너희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준 거라고 할까, 차라리 무고한 사람들의 억울한 눈물이 되어 흐르고 계시지는 않을까?
예수는 힘의 평화를 믿지 않고 평화의 힘을 믿었다. 오실 때부터 그랬다. 왕의 옷을 입고 승리자의 나팔과 함께 화려하게 오시지 않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로 조용히 오셨다. 오셔서도 그는 평생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자와 함께 했다.
지금 예수는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라크 어린이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아니 예수는 그 어린이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닌지. 강자를 따라 전리품이나 챙기려고 하는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운 모양도 없이 풍채도 없이 그렇게 오신 예수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2천년 전의 유대인들은 아닌 건지.
우리가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약탈의 현대문명이다. 에너지 소비로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성장되는 현대문명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세계 4%의 인구를 가진 미국은 세계에서 쓰는 에너지의 25%를 소비하고 있다. 당연히 에너지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한다. 아마 이라크의 석유가 소진되면 또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사우디를 침략할 것이다. 그러니 악의 축은 이라크나 북한이 아니라 에너지 소비에 의존하는 현대자본주의 그 자체이고, 자기성찰을 포기한 현대문명이다.
자연을 약탈하고 이웃을 약탈하는 약탈의 문명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은데. 현대문명의 아이로 태어나 에너지 소비에 길들여지고, 무한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파괴에 둔감하고 절제를 모르는 우리, 이제 우리가 공범이 되어 망치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탐욕스런 마음을 돌아보고 지워내는 것이 부활의 예수를 따르는 삶의 출발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