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정치인 출신을 아예 배제하라는 게 아니다. 행정은 문화창작 행위와 전혀 다른 세계이므로 필요하면 할 수도 있으려니와 정도가 너무 심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장관 자리를 메우기 일쑤였던 문공부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갈 건 없다. 초대 문화부 장관인 문학평론가 이어령씨를 뺀 나머지 장관은 거의 다 국회의원이나 청와대 비서실 인사였다.
애초에 문화부로 출발했다가 문화체육부를 거쳐 문화관광부로 간판을 고친 과정에 이미 그만한 조짐이 내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예술 장르의 경계가 느슨한 가운데 갈수록 오지랖을 넓혀가는 퓨전문화 탓으로 돌릴 것인가. 덕분에 아무나 앉으면 그만인 자리로 치부되었다. 게다가 국회의원 출마자의 ‘대기석’으로 불리울 만큼 경질이 잦아 기껏 행사장이나 돌아다니다 떠난 이가 많다.
참여정부의 이창동 문광부 장관에 대한 기대가 그러므로 컸다. 소설과 영화감독으로 튼튼한 역량을 다지고 ‘스크린쿼터 비대위’ 대변인으로 활동한 경력 등을 생각하며 모처럼 알맞은 일꾼을 얻었거니 여겼다. 한데 언론자유 말살의 대역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닦달당하고 있다. 야당의 괘씸죄까지 덮어 쓴 모양으로 사단이 벌어져 취임 두 달도 못되는 시점에서 장관을 그만두라는 소리마저 듣는다.
‘홍보업무 운영방안’ 때문이다. 문광부에 한정된 조치라는 이 장관의 전제를 떠나, 출입기자단과 기자실을 폐지하고 브리핑 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옳다. 그것은 곧 일제시대 이래의 폐쇄적 유물인 까닭에 언론계 안에서조차 폐기설이 제기되었던 관행이다. 일본의 언론통제기구였던 내각정보국이 42년에 실시한 기자등록제도 기자실과 기자단을 바탕 삼아 획책한 것이다. 한국의 군정시대에 등장한 ‘프레스 카드’ 역시 기본 맥락은 같다.
문제는 공보관을 통한 사전 면담신청, 취재원 실명제, 취재 응대 후 보고서 제출 등인데, 그 부분은 되도록 빨리 보완하는 게 낫다. 시행하기 어려울 뿐더러 자칫 소모적 피로감만 촉발시키기 쉬운, 지나치게 많이 나간 착상이다.
지나치게 많이 나가기로는 메이저언론들이 연일 퍼붓는 융단폭격 수준의 대응인들 다를까. 자제력을 잃은 살벌한 기세가 지면에 넘쳐흐른다. 다 좋은데, 어째서 그런 발상이 나왔는지 차분하게 살피는 대목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게다. 여론시장 독과점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정당성을 앞세우기 전에, ‘자전거일보’를 운운할 정도로 어수선한 판촉경쟁을 자성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국회에서 나온 욕설투 발언을 원색대로 시시콜콜 옮기는 것도 이른바 퀄리티 페이퍼의 당연한 의무인가. 국회의원의 품위와 더불어 염려스럽다.
86년 가을, 일본의 문화청 장관을 지낸 작가 미우라 슈몽(三浦朱門)은 등받이가 엄청 높은 장관 의자가 싫어 응접탁자에서만 사무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창동 장관의 저런 언행도 작가 특유의 자유스런 결벽성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와는 다른 각도에서 정부의 언론 정책은 일관성이 없어보인다. 따로 따로 흩어져 홍보라인이 영 가닥을 잡지 못하는 눈치다. 옥상옥 같은 국정홍보처는 반드시 필요한 기구인지 검증하는 일을 비롯하여, 내부 조정이 절실한 단계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