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의 부시는 이라크의 만만찮은 저항에 당황하고 놀란 모양이다. 하긴 하느님 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는 이슬람교도들이 미국을 믿을까, 미국이 보여주는 핑크빛 청사진을 믿을까? 부시는 ‘전쟁 끝’을 선포했건만 곳곳에서의 저항으로 미군이 자꾸자꾸 사망한다. 전쟁 중에 죽은 미군 1백38명, 전쟁이 끝났다는 부시의 선언 이후에 죽은 미군은 벌써 그 숫자를 훨씬 넘겼다. 앞으로 얼마나 더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오죽하면 이라크에 주재했던 UN임직원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이라크를 떠날까?
아무리 부시가 전쟁 끝을 선포했어도 이라크 상황은 전시다. 그런 이라크에 우리의 젊은이를 보내야 할까? 더구나 이라크 전쟁은 UN의 승인도 받지 못한 침략전쟁이었는데. 국제사회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미국의 ‘애국주의’를 부추기며 진군했건만 전쟁의 명분으로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만을 세계 방방곡곡에 알리며 승리의 나팔을 분 전쟁이었는데 진작 이라크인들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에 거세지자 미국은 마침내 미국 젊은이들의 피를 대신할 피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왜 사건은 미국이 만들고, 이유 있게 저항하는 이라크인들을 향해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총을 겨누고 피를 흘려야 하는가. 더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에 빚진 게 없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애국주의’에 열광했던 미국인들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윤영관 외무부 장관이 말했다. “여론보다 국익”을 선택하겠다고. 왜 그 말이 ‘소신’으로 해석되지 않고 우리 국민보다는 미국의 눈치를 더 살피겠다는 뜻으로 들릴까? ‘용병’이 국익일 수 있을까?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 땅에 치유의 손길이 아니라 고난을 더하는 군대를 보내는 건 분명히 용병이다. 더구나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침략전쟁’으로 인해 오랜 기간 엄청난 고난을 겪은 민족이다. 그런 우리가 침략을 옹호하는 군대를 파병한다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슬픈 민족이 될 것이다.
5월, 노 대통령의 방미를 기억한다. 북핵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노무현’답지 않게 미국에 대해 얼마나 넉넉했는가. 그랬는데도 미국은 대북 강경책을 썼다. 그런 미국이 요즘 북한에 대해 유화책을 쓰고 있는 것은 노 대통령이 넉넉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라크 문제로 미국 자신이 국제 사회에서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재건 사업으로 ‘국익’을 얻을 거라 했던 지난 파병 이후, 이라크 재건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우리 기업이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걸 국익으로 내세울건가? 진짜 국익이 문제라면 13억 이슬람권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는지.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