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3천배가 끝나니 가야산도 환해지고 마음도 후련해지고 홀가분해졌다. 3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다는 성철 큰스님이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도인이길래 3천배를? 잔뜩 기대했고 그만큼 부풀어 있었다. 그를 만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기도 했다. 스님이 거처하신다는 암자는 너무나 소박해서 오히려 빛났단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오늘은 큰스님(성철스님)이 몸이 좋지 않으셔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겠다는 거였단다.
10년 전 성철스님의 열반소식으로 온 매스컴이 들썩거렸을 때 친구가 전해준 성철스님과의 인연 아닌 인연이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깔깔댔었는지. 그런데 왜 성철스님은 3천배를 시키셨을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권력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방문해서 뵙기를 청하셨을 때도 “나는 내 할 일이 있고 대통령은 대통령의 일이 있는데 산중의 중을 볼 일이 없다”며 물리셨던 스님 자신이고 보면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겠다는 그런 뜻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런데 나는 3천배를 할 수 있을까? 절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서산대사가 말한다.
배한다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다.(禮拜者敬也伏也)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며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恭敬眞性屈伏無明)
이상하다. 절을 하면 겸손해지고 고요해지고 순해지고 경건해진다. 절을 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욕심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거둬내고 겸손한 마음으로 길을 간다는 것일 것이다. 욕심과 노여움으로 어지러워지면 길을 잃게 되니까.
성철스님 열반 10주기라는 얘기를 여기 저기서 듣는다. 누더기 옷도 초라하지 않고 차릴 것도 없을 만큼 소박하기만 했던 식사도 넉넉하기만 했던 스님의 진면목은 불사로 화려해진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서조차 찾을 길 없는데 벌써 10년이구나. 세월은 정말 빠르고도 무정하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생전에 그토록 3천배를 시켰던 것일까.
‘나’를 바로 보지 않으면 ‘성철’도 ‘조사’도, ‘부처’도 모두 헛 거라고. ‘나’를 바로 보지 못하면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겠냐고. 일생동안 그 누군가를 속인 일이 없을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간다.” 이 어찌 남녀의 무리를 기만했다는 뜻이겠는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면 “성철”이라는 이름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
남을 위해 기도해 본 사람은 안다. 그 남은 남이 아니라 곧 ‘나’라는 사실을. 남을 위해 기도하는 그 무욕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면 ‘나’의 진면목이 보일까?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