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 홈스테이를 운영하며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분이 있습니다. 이사라님입니다. 오늘의 편지는 이 어머니가 쓴 교육체험기로 대신합니다. 취재를 해서 써도 되겠지만, 두 자녀를 키운 생생한 체험을 직접 듣는 게 더 유익할 듯합니다. 보내온 교육체험기를 그대로 요약해 게재합니다.
졸업식을 하고 아들과 그랜드캐년을 여행하며.
2017년 5월.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미네소타 국제공항에 내리던 날을 기억합니다. 아들의 졸업식이 있던 날입니다. 아들은 미네소타 주립대학을 다녔습니다. 마중 나온 큰 아이를 끌어안으며 지난 10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2007년 5월. 저는 두 아이와 함께 낯선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내렸습니다. 아들은 중학교 2학년이었고, 딸은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유학길이지만 이 도시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2명의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홈스테이를 해주며 같이 키워야 하는 또 한 사람의 엄마가 되는 일입니다. 방이 3개 있는 콘도를 구하고, 학교수속을 밟으며 이 나라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저는 서울토박이지만 경기도 광주에서 영어 과외선생님을 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니 대학을 진학하는 데 많은 어려움들을 보게 됩니다. 지방 학생들이 서울권으로 대학을 가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영어교육도 특별히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영어권 나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찾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교육비와 여기 국제학교에 다니는 비용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예비대학 과정 또는 디플로마(Diploma)와 ADP 편입 프로그램을 거쳐 싱가포르, 호주, 미국 등 어느 나라 대학교로도 편입학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 학비 80%를 지원받고, 나중 그 론을 갚기 위해 현지에서 취업할 수 있는 제도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말레이 반도는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많이 쓰고 있어 언어를 공부하기에도 좋은 환경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확인하고 주저 없이 이곳으로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큰아이는 어릴 때부터 영어CD 시리즈를 거의 외우고, 여러 영어대회도 나가 상도 받곤 해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국제학교 입학하며 테스트를 하니 영어 준비반에 들어가라고 해, 영어를 가르쳐왔던 엄마인 저로서는 몹시 실망스러웠습니다. 오히려 영어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작은아이는 정규반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 네 아이들은 영어, 수학 등 전 과목을 집에서 함께 공부하여 모두 6개월 만에 정규반에 들어갔습니다. 애들이나 저나 정말 타이트한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욕심쟁이 엄마’를 잘 따라준 덕택입니다. 큰아이는 성격이 밝아 주변에 친구가 많았고 덕분에 홈스테이도 잘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에 다니며 피아노, 기타, 드럼 등을 배웠습니다. 밴드활동입니다. 그때 음악활동을 하던 아이들이 잘 성장해 지금도 엄마들과 그 추억들을 얘기하곤 하지요. 한 아이는 아프리카를 돕는다며 프랑스의 한 의과대학으로, 노팅엄 대학으로, 영국 런던으로, 미국 미네소타로 떠났습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학년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ADP라는 미국 편입 프로그램을 선택했습니다. 예비대학교에서 1년 반을 공부하고 미국 대학으로 편입해 2년 반을 공부했습니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는 방법은 SAT와 ADP가 크게 다릅니다. SAT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좋은 성적으로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방법입니다. ADP는 이곳 예비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을 인정받아 미국 대학으로 편입하는 제도입니다. 보통 1~2년 필요한 과목을 이수하고 3~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그 이유는 미국의 대학에서 인정해주는 과목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는 미국보다 학비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큰 장점입니다. 큰아이는 이 프로그램으로 미네소타 주립대학에 갔습니다. 거기서 잘 알려진 학과인 저널리즘을 공부했습니다. 미네소타는 미국 중부에 있고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교육도시입니다. 그 낯선 곳에서 혼자 공부하며 올A 학점으로 졸업해, 명예의 전당 자리에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여기 처음 와서 전과목을 영어로 보는 시험에 평균 50점을 넘지 못하던 아이였는데. 미국 유학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제 형편도 넉넉지 못했는데. 큰아이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언론사에서 국제부 기자로 입사해 일하고 있답니다.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교육을 체험한 한국 학생들.
교회에서 방송반 활동하던 작은아이는 음향과 무대연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을 찾다보니 Performing Art를 전공하는 디플로마 과정이 있었습니다. 3년 과정의 전문분야입니다. 혼자 오스트리아 비엔나, 체코 등 음악의 본향을 여행하기도 했지요. 마지막 학기 6개월은 인턴 과정이어서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갔는데 정식 직원이 되었습니다. 영어와 중국어도 잘하고 진취적인 성격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딸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를 더 공부하기 위해 전문 대학원을 가는 일입니다. 영국에 그 디그리 과정의 대학교가 있습니다. 학비를 모아 내년에 진학한다고 하니 대견스럽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저는 아이들의 꿈을 키워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열린 교육제도가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가 있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뒤섞여 살기에 ‘화합’하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조국을 떠나며 버킷 리스트를 만든 게 있습니다. 10년 후, 작은 꿈을 이루면 꼭 해야 할 리스트. 그중 하나가 ‘미국 그랜드캐년 여행가서 나 열심히 잘했다고 칭찬하고 오기’. 그런데 정말 그곳에 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들 졸업식이 끝나고 아들과 여행을 했습니다. 미네소타주에서 네바다주로 갔습니다. 똑바른 길을 한참 달려 나타난 그랜드캐년. 끝없이 펼쳐진 협곡들. 인생의 협곡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계곡 앞에서 나를, 그간의 나를 칭찬해주어야 하는데. 그냥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눈물이.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