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전자 서초 사옥. 고성준 기자
만약 삼성이 삼성전자 경영권을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지배구조 개선을 진행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삼성은 지난 정부 때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으로 ‘3세 경영 승계’의 ‘5부 능선’을 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국회를 비롯해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부처가 한 목소리로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문제 삼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당이 추진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삼성생명이 보유할 수 있는 삼성전자 지분 한도는 현재 10%에서 3%로 감소한다. 즉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이 현재 8%에서 3%까지 감소하고, 삼성 오너 일가의 지배력도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보험업법 개정과 별개로 삼성전자가 앞으로도 계속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할 텐데 어느 시점이 되면 삼성생명 지분율이 10%까지 오를 수 있다”며 “이런 부분까지 고려해 (삼성생명 지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사안이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지배력 확보에서 삼성생명의 대안으로 떠오른 곳은 3대 주주인 삼성물산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분 17.08%로 최대주주기도 한 삼성물산은 일찍부터 삼성 승계 구도의 핵심 회사로 지목돼 왔다. 삼성물산은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생명, 삼성SDS 등을 지배하고 있다. 이 부회장 등 삼성 특수관계인의 지분은 39.06%로 다른 대기업 오너 일가가 가진 지주사 지분율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재계에선 오너 일가가 지주사 지분 30% 이상을 가진 경우 최소한의 경영권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한다. 지주사가 직접 지배하는 자회사의 경우 의무적으로 20% 이상의 지분을 소유해야 한다.
삼성은 공식적으로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인정하지 않지만 삼성의 실질적 지주사가 삼성물산이란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박근혜 정부 때 삼성이 전자와 금융, 바이오 부문으로 그룹을 쪼갠 뒤 각각 지주사로 전환하는 계획을 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며 “올해 들어 삼성 각 계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삼성물산을 축으로 깜짝 놀랄 만한 변화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아는데, 삼성물산 본사 이전 등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삼성물산의 딜레마는 지주사 역할을 하지만 모순되게도 지주사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약 25조 원으로 삼성전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 지주회사법에 따라 삼성물산이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기 위해선 15%에 달하는 지분을 추가 매입해야 한다. 삼성물산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재원을 단기간에 스스로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요신문DB
그러나 결과적으로 삼성물산의 ‘주식 대박’은 다시 삼성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만약 삼성물산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삼성물산 자산 총액의 50%를 넘으면 공정거래법에 따라 지주사로 강제 전환해야 한다. 지주사 강제 전환은 삼성으로서 매우 치명적이다. 첫째 삼성전자 지분을 15%나 추가 매입해야 하고, 둘째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삼성물산이 가진 금융회사 주식을 2년 내에 처분해야 한다.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 매입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수 있다. 현재 삼성물산은 ‘바이오 황제주’로 불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최대주주기도 한데 관련 주식 가치가 커질수록 지주사 전환 압박이 세지는 또 다른 딜레마에 처해 있기도 하다.
때문에 시장에선 삼성물산이 일부 계열사를 합병하는 등 자산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3월 삼성물산 건설 부문이 서울 상일동 삼성엔지니어링 사옥으로 이전한 것은 ‘합병설’에 힘을 싣는다. 지난 1분기 삼성엔지니어링의 매출은 전년 대비 20%가량 감소한 1조 2175억 원을 기록했다. 자산 총액은 5조 원으로 삼성물산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삼성은 2014년 삼성엔지니어링을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했다. 현재 삼성물산에서 EPC경쟁력강화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고 있는 김명수 삼성물산 부사장은 당시 미래전략실 소속으로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의 합병을 주도했다. 두 회사 합병은 당시 주주들 반발로 무산됐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김 부사장이 여전히 ‘이재용의 남자’로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중공업은 물론 삼성물산,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성엔지니어링발 구조조정은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 관측한다.
또 삼성엔지니어링과 합병을 추진한 삼성중공업도 사업 부문을 쪼갠다면 삼성물산 품에 안길 수 있다. 자산 총액 14조 원에 달하는 삼성중공업은 삼성전자가 지분 16.91%로 최대주주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자사의 사업 영역과 직접 연관이 없는 중공업 지분을 보유한 것에 대해 그간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은 올 1분기 기준 전년 대비 50% 급감한 1조 2408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은 최근까지 삼성물산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중간 지주사 격인 삼성전자가 남은 전자 관련 계열사를 지배하는 경영 승계 플랜을 그려왔다. 이 경우 삼성전자가 지배력을 확보한 삼성SDS는 삼성물산이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SDS 지분(17.1%)은 매각되거나 삼성전자 소유 다른 지분(삼성중공업 등)과 교환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변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 공여 등 혐의로 최종 선고를 앞둔 이 부회장의 유무죄 여부다. 이 부회장이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 짓고 경영 전면에 복귀할 경우 삼성의 구조조정은 ‘책임 경영’ 등 명목으로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 파기 환송 등 유죄 취지 판결이 내려지면 삼성물산 중심 지배구조 개편은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