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패자의 대지에서 착하고 온순한 백성들은 강간당하고 착취당하고 배반당한다. 시대를 읽는 젊은이들은 그저 절규의 노래, 절규의 몸짓을 할 수밖에 없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가 펄펄 나구요. 이 내 가슴 타는 덴 무엇으로 끄려나. 서울 장안 타는데 한강수로 끄려만 삼천만 가슴 타는 덴 무엇으로 끄려나. 에헤야 데헤야 혁명의 불길이 타오른다.”
3·1운동으로 세계 방방곡곡에 우리의 처지를 호소했건만 세계는 힘의 논리로만 굴러갈 뿐 아무도 패자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다. “누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줄까요? 동양의 이름 모를 식민지에.” 정옥의 냉소는 차라리 현실이다. 그 시대를 그린 만화를 보면서 나는 우리 시대 이라크를 생각했다.
국제사회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미국의 ‘애국주의’를 부추기며 진군했다. 그랬건만 전쟁의 명분으로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라크가 미국을 공격할 무기를 갖고 있다는 미국의 정보는 허위정보, 조작된 정보였던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오만을 세계 방방곡곡에 알린 그 전쟁은 이제 미국 내에서도 비판적인 분위기여서 지금 대통령을 선출하면 침략전쟁을 일으킨 부시가 아니라 침략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케리가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또 왜, 그 억울한 땅, 이라크에 국군을 보내는가? 더구나 전투병을! 하나님은 한 분이기에 아들도 없다고 강력한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라크인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는데 미국이 두려울까?
미국이 자신만만하게 전쟁의 끝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 중에 죽은 미군보다 전쟁이 끝나고 죽은 미군이 더 많아 사망자가 벌써 5백 명이 넘고 있다. 이라크는 지금도 전시다. 위험한 곳이다.
그래도 보낼 만한 가치가 있다면! 위험한 지역이어서 파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 땅에 치유의 손길이 아니라 고난을 더하는 군대를 보내는 건 분명히 용병이기 때문에 파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상의 양보가 비전투병 아니었는가. 더구나 우리는 멀지 않은 역사에서 ‘침략전쟁’으로 인해 오랜 기간 엄청난 고난을 겪은 민족이다. 그런 우리가 침략을 옹호하는 군대를 파병한다면 역사는 왜 배우는가.
굽신거리는 외교는 하지 않겠다던 노무현정부가 세계적으로 ‘침략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는 전쟁에 전투병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이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전투병 파병을 반대했던 열린우리당은 당론을 변경해서 파병에 동의했다. 돌연하고 착잡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데 집권당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이 이야기하는 ‘새 정치’는, 그리고 ‘개혁’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건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