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 ||
그는 ‘상황법학’이라는 희한한 논리로 나치스의 ‘제3제국 헌법’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 히틀러의 독재체제를 합리화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치스에 적극 협력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슈미트의 ‘부역(附逆)’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슈미트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나치스의 고참당원들은 그를 ‘3월의 꽃제비’라며 빈정거렸다. 히틀러의 독재체제가 확립된 1933년 3월 이후에 입당한 ‘늦깎이 당원’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수상에 취임한 것은 1933년 1월30일이었다. 히틀러는 그 다음날 국회를 해산했고 3월5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나치스당은 2백88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국회를 장악한 나치스는 3월23일, 히틀러에게 4년간 독재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킨다. 이 잔인한 3월은 히틀러의 독재체제가 확립된 달이기도 했다.
슈미트가 나치스의 정식 당원으로 가입한 것은 그해 5월1일이었다. 고참당원들이 슈미트를 ‘3월의 꽃제비’라고 빈정거린 것은 나치스체제가 확립된 뒤에 입당한 기회주의자라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강요에 못이겨 또는 적극적으로 나치스에 협력하고 당원이 되었던 지식인들을 통틀어 ‘3월의 꽃제비’라고 불렀다.
1933년부터 45년까지 당비를 꼬박꼬박 납부했던 열성당원 마르틴 하이데커는 1966년의 한 인터뷰에서 “1933년의 시점에선 나치즘 이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기회주의적인 ‘`3월의 꽃제비’는 비단 나치스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자의 둥지를 떠나 강자의 품에 한 몸을 의탁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자 염량세태(炎凉世態)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예부터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발길을 끊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정동영 효과’에 이어 탄핵효과까지 겹쳐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자 평소 우리당에 냉소를 보내던 인사는 물론, 신당 창당을 모질게 비난하던 인사들까지도 공천을 기대하며 우리당을 기웃거렸다. 오죽했으면 창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 의원이 `우리당이 ‘철새 도래지(渡來地)냐’며 분통을 터뜨렸겠는가. 민주당을 탈당하고 우리당에 입당했던 한 정치인은 당내 반발로 끝내 비례대표 자리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정치인도 역풍이 거세지자 느닷없이 당지도부를 비판하며 탄핵반대의 투사로 변신하는가 하면 야당의 인기가 떨어지자 아예 당적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인도 있다.
정치적 신념이나 유권자와의 약속따위는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처세술이다. 눈앞의 이해(利害)에 따라 둥지를 옮기고 깃털을 바꾼 ‘3월의 꽃제비’들을 가려내고 표로 심판하는 일은 결국 우리 유권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