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를 느끼고 있노라면 문득문득 전해오는 편안함이 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편견에 편견을 더하며 진창이 되어버린 삶에서 일순간 편견을 뚫고 생각을 깨고 나타나는 진실의 꽃을 본 느낌! 아마 원효도 종종 생각의 진창을 경험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해골 물 이야기뿐 아니라 원효가 낙산사 가는 길에 만난 두 여인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원효가 낙산사를 찾아간다. 가는 길에 벼를 베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장난기가 동한 원효는 그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했더니 그 여인도 장난스럽게 이렇게 대답한다. “벼가 제대로 열매 맺지 않았습니다.” 익지 않은 벼를 베어낼 리 있을까? 여인이 원효에게 볏단을 공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 여인을 지나 얼마쯤 걸어가니 개천이 흐르는 다리가 있는데 거기서 원효는 생리대를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원효가 그 여인에게 먹을 물을 청하니 그 여인, 버드나무 가지 띄워 한 바가지 떠주면 좋을 것을, 그리하지 않고 그냥 생리대 빨던 물을 떠 주는 것이었다. 원효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깨끗한 냇물을 떠서 마신다.
물을 마신 원효가 길을 떠나려는데 들판의 소나무에 앉았던 파랑새가 “스님은 떠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취를 감췄단다. 원효는 그 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소나무를 살피는데 새는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침내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는 관음보살상 앞에 섰다. 그랬더니 거기 바로 또 다른 한 짝의 신이 놓여있었다. 파랑새가 보여준 신의 다른 한 짝의 신이. 그 신은 관음의 신이었다. 낙산사로 가는 길, 원효가 만난 여인들이 바로 관음이었던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한다.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 높으신 원효에게도 더러운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꿈처럼 나타난 관음의 태도에 주목한다. 관음은 원효를 “불구부정!”이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을 뿐.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는데 관음상 앞에 도달한 원효가 스스로 빨래하고 있던 여인이, 벼를 베고 있던 여인이 관음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도처가 관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우리는 관음의 벼를, 관음의 밥을 먹을 수 없고, 관음의 물을 마실 수 없다. 관음이 대접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