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 ||
교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언덕 위에 자리잡은 교회를 보면서 예배당은 하늘을 섬기기 때문에 하늘과 가까운 언덕 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선교사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언덕에 터잡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 건국 이전부터 가꾸어 온 그들의 전통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아메리카대륙이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1630년, 매사추세츠주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존 윈드롭은 청교도 개척자들에게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쏠려 있다”고 선언했다. ‘언덕위의 도시’란 신대륙에 자리잡은 앵글로색슨족은 대영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3백여 년 동안 이어온 ‘미국식 예외주의’의 정신적 바탕이기도 했다.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은 일약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제2차대전 이후의 동서냉전체제에선 구 소련과 자웅을 겨루는 서방의 지도국가로서 우뚝 솟아 올랐다. 더군다나 이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면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식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은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였고 그들의 제도와 가치는 모든 신생국가들이 따라 배워야 하는 전범(典範)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을 거치며서 ‘모범국가’ 미국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전쟁기간 동안 ‘전시에는 법도 침묵한다’는 격언처럼 미국의 언론자유도 국익과 애국주의의 깃발 아래 크게 왜곡되었다. <뉴욕 타임스>가 편집국장 이름으로 이라크와 관련된 보도에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반성과 사과문을 실은 것은 그동안의 언론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이라크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는 미국이 건국 이래 가꾸어온 인권의 가치가 전쟁터에선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가뜩이나 전쟁의 명분조차 의심받는 판에 터져나온 포로학대 사진과 동영상은 전 세계인이 우러러보던 ‘언덕 위의 국가’ 미국에 대한 신뢰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며칠 전 유럽연합 25개 회원국과 중남미 33개국 지도자들이 멕시코에 모여 포로 학대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하고 미국의 독주를 비난한 것 역시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미국에 대한 비판이었다.
미국이 앞으로도 ‘언덕 위의 국가’로 전 세계가 신뢰하고 따르는 모범국가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이라크사태를 얼마나 슬기롭게 마무리짓느냐에 달려있다. 우호적이고 신뢰적인 맹방(盟邦)관계는 결코 우월한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19세기 말과 같은 포함(砲艦)외교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