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연(35)이 요즘 이래저래 화제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통해 국내 무대에 데뷔했고, 뒤이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의 주연 자리를 차지하더니 이들 작품으로 2년 연속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성과 때문이다. 한쪽에선 ‘버닝’ 개봉 직전 자신의 사적인 공간인 SNS에서 친한 감독의 어린 시절 사진에 무심코 누른 ‘좋아요’ 버튼이 엉뚱하게 욱일기 미화 논란으로 확대되면서 상당한 마음고생도 겪었다. 본의와 진심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대부분인데도, 온라인 공간에서 그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일련의 상황으로 스티븐 연을 온전히 평가할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영화와 한국에서의 연기활동에 나선 그의 각오와 마음까지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운 일. ‘버닝’을 들고 칸 국제영화제를 찾은 스티븐 연을 현지에서 만났다. 그는 조심스러워했지만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영화 ‘옥자’에 이어 ‘버닝’ 출연으로 2년 연속 칸을 밟은 스티븐 연. 사진 제공 = CGV아트하우스
칸에서 만난 스티븐 연은 “작고 조용한 영화(‘버닝’)가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깊고 진실하게 세상을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감격해 했다.
“사실 ‘옥자’ 촬영 땐 교포처럼 지냈어요. 폴 다노, 릴리 콜린스와 함께하는 장면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한국말) 통역자 역할이었죠. 내 자신을 완전히 느끼진 못했어요. 그저 작은 외로움, 복잡함을 느꼈을 뿐이었죠. 하지만 이번엔 한국사람 역할이고, 그러니 완전한 한국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외로움은 더 깊어졌겠죠. 내가 느낀 그럼 외로움이 영화에 깊이 있게 나온 것 같아요.”
스티븐 연의 가족은 그가 5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몇 년 뒤 미국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건축업을 하던 그의 부모는 미국에서 미용용품 판매점을 열어 삶을 이어갔다. 여느 이민 가정의 부모가 그렇듯, 그의 부모도 스티븐 연이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갖길 바랐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스티븐 연이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대학 1학년 때 학교 극단이 하는 연극을 본 뒤였다. 이후 극단에 입단해 연기를 익혔고, 졸업 뒤에는 시카고 지역에서 알아주는 극단 세컨드 시트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동양인인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단역을 거친 그는 2010년 미국 AMC의 드라마 ‘워킹데드’ 시즌1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워킹데드’는 시즌1부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티븐 연의 인기도 치솟았다. 이에 힘입어 지난해 방송한 시즌7까지 햇수로 8년간 시리즈에 참여해 스타로 발돋움했다.
실제로 그가 칸 국제영화제 방문을 위해 프랑스 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땐 현지 팬 150여 명이 현장에 나와 그를 맞았다. 칸을 찾는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의 입국 현장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 ‘워킹데드’와 그 작품 속 스티븐 연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워킹데드’에서 그는 한국인 청년 글랜을 연기했다. ‘옥자’에서도 그의 처지는 비슷하다.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 그의 표현대로라면 “경계에 놓인 교포 역할”이다.
“어릴 땐 나도 미국 사회에 편입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많이 노력했지만 그들이 일정부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면도 있을 거예요.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하는 무서움이 있어요.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그건 곧 나의 ‘파워’(힘)가 돼요. 더 용감해질 수 있고 더 넓어질 수 있어요.”
‘버닝’은 개봉 이후 관객으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사회, 그곳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들여다보는 이 영화는 은유와 함의로 점철돼 있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인물 벤도 그렇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최고급 세단을 몰면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향유하는 인물. 영화에서 그는 “돈이 어디서 나는지 모를, 강남의 개츠비”라고 묘사된다.
스티븐 연은 한국 젊은이들이 외로워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 CGV아트하우스
이창동 감독과 ‘버닝’을 작업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티븐 연에게 잊지 못할 기억과 자극이 됐다. “이창동 감독님은 대단한 선생이죠. 그리고 완전한, 세상의 학생입니다. 내가 볼 때 감독님은 나이가 든 사람이고 오래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런 감독님이 젊은이의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자체로 용감한 성격, 깊은 성격으로 보였어요. 그건 자유롭게 사는 거죠. 얼마 살지 않은 나도, 내가 갖고 있는 걸 내려놓기가 어려운데. 감독님은 그걸 할 수 있다니. 정말 지혜롭구나, 나는 정말 럭키하구나, 했죠.”
# “한국어 배우고 있지만 어렵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우리말이 조금 서툴렀던 스티븐 연은 1년여 만에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으로 실력을 키웠다. ‘버닝’에서는 영어 한 마디 없이 모든 대사를 완벽한 우리말로 표현했다.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스티븐 연은 “뉘앙스까지 익혀야 하는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어렵지만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있고 계속 읽으면서 익히고 있다”는 설명. 그렇다고 한국영화에서 계속 교포 역할을 할 순 없고, 앞으로 또 어떤 한국감독이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해올지 모르니 배우는 일은 놓을 수 없다.
“‘버닝’을 촬영하면서 4개월 동안 혼자 호텔에서 지냈어요. 캐릭터가 주는 느낌은 센데, 혼자 있고 혼자 지내면서는 외로움을 느끼죠. 그 외로움이 나에겐 힘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배운 게 있죠. 세상도, 특히 한국엔 외로운 사람이 엄청 많다는 걸 느꼈어요.”
어떤 면을 발견한 걸까.
“아직 저는 한국에 대해 배워야 할 게 많지만…. 느낀 걸 말하자면, 미국은 오래 전부터 개인주의가 익숙하죠. 하지만 한국은 유교 문화, 정, 한의 정서 같은 유대감이 강한 편이잖아요. 요즘 인터넷이 발달되고 국경이 사라지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이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라라는 의미, 중요성은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죠. 오랫동안 개인주의를 지킨 미국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연대하자는 움직임을 보여요. 한국도 그럴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교포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고 말하기도 조심스럽지만. 어떤 면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외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