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보육교사 이 아무개 씨가 마지막으로 들린 남자친구 집 전경. 금재은 기자
새벽 3시경 용담동의 N 맨션에 도착한 이 씨는 남자친구와 흡연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 3분 만에 집밖으로 나왔다. 3시 3분 남자친구에게 “네가 나한테 이럴 줄 몰랐다. 실망이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3시 5분쯤 애월읍 구엄리에 있는 집에 가기 위해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 택시를 요청했으나 이용객이 많은 일요일 새벽 택시를 잡는 데 실패했다. 이것이 이 씨의 마지막 흔적이다. 한 시간 뒤인 4시 4분쯤 애월읍 광령초등학교 부근 무선기지국에서 이 씨의 휴대폰은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힌 뒤 전원이 꺼졌다.
2월 2일 이 씨가 무단으로 어린이집에 출근하지 않자, 평소와 다른 이 씨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어린이집 원장이 이 씨의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다. 가족은 이 씨가 찜질방에서 자고 직장에 출근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신고를 받고 제주 곳곳을 수색하다 이도2동 주차장에서 이 씨의 차량을 발견했다.
# 공개수사·인력 총동원 수색했지만
2월 3일 경찰은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전단 수천 장을 제주 전역에 배포했다. 인력을 투입해 휴대폰이 꺼진 광령초등학교 부근부터 이 씨가 머무른 곳을 샅샅이 뒤졌다. 실종 엿새째인 2월 6일 이 씨가 실종 당일 들고 나갔던 가방이 제주시 아라동 도로변의 밭에서 발견됐다. 가방에서 이 씨의 휴대전화와 주민등록증 등 소지품이 발견되며 단순 가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강력 범죄 쪽으로 경찰 수사의 가닥이 잡혔다.
소지품이 발견된 다음 날인 2월 7일 제주서부경찰서는 수색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서부경찰서에 수사본부를 꾸렸다. 수사본부는 서부경찰서 형사과를 비롯해 제주지방경찰청과 동부경찰서 등에서 9명의 인력을 지원받아 수사에 나섰다. 2000여 명의 대규모 인력이 투입돼 이 씨의 남자친구와 지인,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다.
애월읍 고내봉 피해자 시신이 발견된 농업용 배수로 장소를 인근 주민이 설명하고 있다. 금재은 기자
# 최초 부검의 결과 경찰과 어긋나
시신은 제주의과대학으로 옮겨져 최초 부검을 받았다. 최초 부검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 씨의 사망원인은 목이 졸려 숨진 경부압박 질식사로 발표됐다. 문제는 사망 시점이었다. 경찰은 이 씨가 실종 당일인 2월 1일 새벽에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2월 8일 발견된 사체는 젖은 상태였는데 2월 3일 이후로는 비가 오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종합해 경찰은 실종당일인 2월 1일부터 발견 전 마지막으로 비가 온 3일 사이에 이 씨가 사망한 것으로 봤다.
반면 최초 부검의는 시신이 발견된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이내인 2월 7~8일 사이에 이 씨가 숨졌다고 추측했다. 부검의는 이 씨의 체온이 대기온도보다 높다는 점과, 위 내용물 검사 결과를 통해 사망 시점을 추정했다. 통상 직장체온은 대기온도보다 높은데 사망 후 24시간이 지나면 직장체온이 대기온도와 같아진다. 이 씨의 경우 직장체온이 대기보다 3.8도가량 높은 것으로 드러나 사망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난 것.
또 이 씨가 실종 전 먹은 삼겹살이 위에서 발견되지 않고, 대신 콩나물과 밥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사망해 발견되기 전까지 이 씨가 추가적으로 식사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부검의는 이 씨가 실종 후 일주일 정도 감금된 상태였을 것이라는 소견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검의가 낸 사망 추정 시점이 경찰의 의견과 달라지며 제주도민의 분노는 들끓었다. 실종 후에도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이 씨를 찾아내지 못한 경찰에 비판이 쏟아진 것.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경찰의 손을 들어주며 논란은 일단락됐다. 사체에서 손이나 발을 묶은 결박흔이나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아 실종 후 일주일간 감금된 상태에서 식사를 했다고 보기가 어렵고, 결정적으로 혈중 알콜농도가 실종 직전 이 씨가 먹은 음주량을 반영한 0.141% 수준으로 검출돼 경찰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부검의와 경찰의 사망시점 추정이 어긋나며 수사는 혼선을 빚었다. 용의자 특정에도 어려움이 컸다. 경찰은 이 씨가 남자친구 집에서 나와 차량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변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저항흔이나 외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씨가 거부감 없이 탈 수 있는 차량은 택시나 면식범의 차량일 것으로 용의자 군이 좁혀졌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제주시내에서 애월로 가는 차량이 통상 거쳐 가는 길목인 일주도로 주변을 통행한 차량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였다.
시신과 그 주변에서 지문이나 제3자의 DNA가 채취되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사체 근처에 담배꽁초가 발견됐으나, 경찰이 탐문 범위에 놓고 조사한 도내 운수업자 수백 명의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해 사건 당일 행적이 의심되는 택시기사 박 아무개 씨의 진술이 거짓 반응을 보인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박 씨는 그의 택시차량이 실종 당일 피해자가 거쳐갔을 경로 중 유력한 곳으로 보이는 곳의 교통정보수집기(CCTV)에 찍혀 주요 용의자 중 한 명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경찰이 확보한 DNA 증거와 박 씨의 것이 일치하지 않았고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 개돼지 사체로 사망시점 뒤집혀, 용의자 포위망 좁혀지나?
제주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은 지난 1~3월 이 씨 사건의 사망 시점을 재추정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가 이끈 실험팀은 개와 돼지 사체 7구를 이용해 시신이 발견됐던 당시와 같은 조건 하에서 사체 부패 경과를 살펴봤다. 실험팀은 이 씨가 발견된 농업용 배수로에서 개와 돼지 사체에 이 씨가 입었던 무스탕 외투와 비슷한 옷을 입히고 사후 체온을 측정했다.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가 25일 제주지방경찰청에서 장기미제사건으로 남아있는 2009년 ‘보육교사 피살사건’ 피해자의 사망시간을 추정하기 위해 진행한 동물이용 실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험결과 동물 사체는 사후 7일 뒤에도 직장체온이 대기온도보다 높은 현상이 나타났다. 경찰에 따르면 사체가 입고 있던 겨울 외투와 움푹 패인 배수로가 일정부분 보온효과를 준 것도 사체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실험을 통해 이 씨가 실종 당일인 2월 1일부터 발견 전 마지막으로 비가 온 2월 3일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사망 시점이 좁혀졌다.
사건발생 당시 피해자의 사망 시점에 혼선이 생겨 유력 용의자 박 씨를 놓친 경찰은 10년이 지난 지금 사망 시점을 재특정해 용의자 포위망을 좁힐 수 있었다. 최초 부검 당시에는 경찰과 부검의 사이에 사망 추정시간에 대한 이견이 있었고, 다른 사망 추정 시점인 2월 7~8일 박 씨는 알리바이가 있어 용의선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동물 실험으로 사망시점을 새로이 특정한 만큼 다시 박 씨를 유력 용의선상에 올렸다.
# 유력 용의자 구속영장 기각, 경찰 여전히 자신 있는 이유는?
제주지방법원 양태경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20일 강간 등 살인 혐의로 청구된 박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피해자 이 씨의 사망시점이 범행 직접 증거가 되기 어렵고, 피의자 차량에서 발견된 섬유 증거가 ‘유사’성을 갖지만 직접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영장기각에 대해 경찰은 “9년 전 발생한 미제사건에 과학수사를 도입해 재수사 발판을 만들었다. 증거를 보완하고 추가 증거를 수집해 수사를 해나가겠다”고 밝히며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우선 경찰이 객관적 증거로 제시한 CCTV 영상은 피해자가 실종 당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박 씨의 NF소나타 차량이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번호판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 증거로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경찰이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은 ‘교차증거’로 볼 수 있는 ‘섬유 조각’ 확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교차증거는 피해자의 것이 가해자에게, 가해자의 것이 피해자에게 남아 있어 서로 같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직접적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경찰은 피의자 박 씨의 차량에서 발견된 섬유가 피해자의 무스탕 털에서 나온 것으로, 피해자 상반신과 하반신에 발견된 실오라기는 피의자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법원은 경찰이 제출한 섬유증거에 대해 동일한 섬유라 하더라도 공장에서 여러 벌의 옷을 찍어내기 때문에, 해당 섬유가 사건 당사자가 입은 바로 그 옷이라고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법원에서도 섬유 증거에 대해 ‘유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황증거도 있다. 박 씨는 2009년 사건이 발생한 뒤 2010년 돌연 강원도로 떠났다. 올해 2월에는 경북으로 거취를 옮겼다. 경찰에 따르면 보육교사 살인사건에 대해 언론보도가 나오던 최근까지 박 씨는 휴대폰으로 관련 기사를 검색해왔다.
양수진 제주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수사팀장은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주변인이나 관계자들의 기억이 흐려지고 수사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번 동물실험 및 과학수사 도입으로 장기미제사건 수사에 탄력을 받았다”며 “진범을 밝히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