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인생이 뭔가 거창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과정인 줄 알았을 때 나는 먹는 일을 우습게 알았다. 무엇이든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잤으면서도 음식을 하는 손을 존중할 줄 몰랐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쯤으로 여기고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살아볼수록 느끼는 건 세상이 대접을 하는 일은 있지만 특별하게 대접을 해야 하는 거창하기만 한 일은 없다는 것이고, 세상이 소홀하게 대접하는 일은 많지만 무시당해도 좋은 하찮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한때 세계를 움직였던 이가 가도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렇지만 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는 것이다.
이젠 알 것 같다. 제대로 먹는 일과 제대로 음식을 만드는 일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일 중의 일임을. 그 일은 바로 생명을 품고 키우고 모시는 일 중의 일이다. 이제 나는 사랑한다.
걸인의 찬으로도 황후의 밥상을 만드는 사람을. 기분 좋게 먹음으로써 따뜻한 밥상을 만드는 그는, 아이든 어른이든 기분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식복을 복 중의 복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
먹는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당연히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아무하고나 먹을 수 없다. 삶을 나눌 수 없는 사람과 밥상에 마주 앉으면 황후의 찬도 걸인의 밥이 되고, 밥상이 약상이라고, 김치 한 종지, 콩나물국 한 그릇에도 정성을 바치는 사람과 마주 앉으면 걸인의 찬이라도 황후의 밥이, 신께 드리는 경건한 제사상이 된다.
사실 현대병의 대부분은 못 먹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잘 먹어서 생긴다. 오죽하면 소박한 밥상이 좋은 것이고 나아가서 초라하기까지 한 밥상이 제일 좋은 상이라고 할까? 무용가 홍신자 선생은 평생을 김치와 된장으로 살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전쟁이 끝난 후라 누구나 그렇게 먹었고, 유학 가서는 가난해서 그렇게 먹었으며, 돌아와서는 그렇게 먹는 것이 몸이 편해서 그렇게 먹었다나! 건강한 자연주의자 홍신자다운 먹거리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먹는 것,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그 사람을 보여주는 중요한 방식이다. 기분 좋게, 감사히, 적당히, 천천히 음미하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쓰레기만두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만두는 먹는 일의 신성한 기쁨을 잃어버린 사회의 귀결이다. 적당한 허기를 만들어 좋은 먹거리로 감사히 먹는 기쁨!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생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