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킹 사건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는 김경수 민주당 경남지사 후보(앞줄 오른쪽). 고성준 기자
김경수·김태호 후보는 차기 총·대선 과정에서 세대교체론을 주도할 진보와 보수의 아이콘이다. 이번 지방선거 한 판으로 이들의 매치가 끝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적어도 10년간 이들은 물고 물리는 전선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2년차에서 맞붙은 경남지사의 5월 말 현재 판세는 ‘여당 우세’다. 김태호 후보가 9회 말 역전 홈런을 날리지 못한다면, 이 승부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야권 패배’ 딱지다.
다만 현 국면에서 부담을 느끼는 쪽은 김태호 후보가 아닌 김경수 후보다. 원래 쫓는 자보다는 쫓기는 자가 다급한 법이다. 게다가 김경수 후보에겐 이번 판은 ‘패하면 안 되는 선거’다. 여당은 이번 선거에서 대구·경북(TK)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의 압승을 노리고 있다. 이 국면에서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출마한 김경수 후보가 패한다면, 상처가 적지 않다. 애초 김경수 후보는 드루킹 파문이 제기된 직후 지방선거 불출마로 선회했다가 추미애 민주당 대표와 청와대의 설득 끝에 다시 출마로 턴했다.
변수는 드루킹 특검이 지방선거판을 흔들 수 있느냐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드루킹 파문의 부메랑은 지방선거 한복판을 정조준하고 있다. 일명 ‘드루킹 특검법안’은 5월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송인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지난해 5·9 대선 전 드루킹을 만났다는 사실이 보도된 직후다. 문 대통령까지 입을 열었다. 문 대통령은 드루킹 특검법안이 통과한 날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드루킹 관련 보고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아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했다. 청와대는 송 비서관과 드루킹 만남을 4월 중순께 인지하고서도 뒤늦게 공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도 “드루킹 사태로 두 자릿수였던 지지도 격차가 한 자릿수로 줄어들 수는 있어도 판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드루킹 사태가 수면 위로 재부상했지만, 현재 여론조사 추세의 변화는 없다. 다만 민주당은 지방선거 막판까지 김경수 후보에 대한 전방위적인 방어 태세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김경수 후보는 경찰 출석(5월 4일), 선거사무소 개소(5월 17일) 등에서 당의 대선후보급 대우를 받았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통상적으로 경찰 조사 등을 하면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는 말만 하고 들어가지만, 당시 김경수 후보는 당 대표 정도나 할 비판적 발언을 쏟아냈고 의원 몇몇을 대동하면서 위세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했다”며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읽힌다”고 밝혔다. 여당 한 보좌관도 “드루킹 사태로 김경수 후보의 인지도는 대선후보급으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여당 관계자들은 김경수 후보의 강점으로 ‘상품성’을 꼽았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끝까지 모신 ‘마지막 비서관’이다. 문 대통령이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엔 입 역할을 하면서 ‘노무현 친구’의 복심으로 통했다. 문 대통령의 첫 방미 일정에도 동행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20대 총선에서는 당내 최고 득표율로 3수 끝에 당선됐다. 당내 비문(비문재인)계 의원들까지 김 후보를 칭찬할 정도로 비토세력도 적다. 친문(친문재인)계의 한계인 패권주의 이미지를 상쇄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2인자 없는 친문계 내부조직 한계로 ‘김경수 대안론’은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카드다. 반론도 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다수의 국민은 대통령에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김경수 후보는 이미 상처가 난 상황 아니냐”라며 “안 전 지사가 법원에서 100% 무죄를 받더라도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만에 하나 선거에서 패한다면 특검 등 수사 결과에 따라 김경수 후보가 궁지에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태호 자유한국당 후보(맨앞). 박은숙 기자
이번 경남지사 선거가 김경수 후보에게 ‘패해선 안 되는 선거’라면, 김태호 후보에게는 ‘져도 남는 선거’에 가깝다. 문 대통령의 역대급 지지도 탓에 누가 나와도 쉽지 않은 선거다. 김태호 후보로선 당의 전략공천을 발판으로 정치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1962년생인 그는 아직 50대에 불과하다. 김경수 후보는 1967년생으로 더 젊다. 김태호 후보로선 50대 기수론의 마지막 불꽃을 발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다만 전제조건은 ‘석패’다. 더블스코어 차이로 질 경우엔 상처가 불가피하다. 보수의 구원투수로 거듭날 수 있느냐의 갈림길에 선 셈이다.
김태호 후보 측은 도지사 재선의 행정 경험과 2012년 19대 총선 때 김경수 후보를 4.2%포인트 차로 꺾었던 전례 등을 들어 막판 뒤집기를 자신하고 있다. 야당 후보가 난립하지 않은 것도 청신호다. 현재 경남지사 후보는 두 김 이외 김유근 바른미래당 후보가 전부다. 김태호 후보가 보수표 결집을 자신하는 이유다. 여기에 드루킹 특검은 경우에 따라 판을 흔들 태풍으로 격상할 수도 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드루킹 사건으로 적어도 경남지사 선거는 최소 경합 상태에서 출발했다”며 타 지역보다는 접전을 펼칠 것으로 전망했다. 전 평론가도 “당에서 전략공천을 받은 김태호 후보가 보수 궤멸 상태에서도 박빙 승부를 펼친다면, 정치 재기의 발판은 마련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태호 후보가 만에 하나 뒤집기에 성공한다면, 가장 유력한 보수진영의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출범 이후 야권 전면에 섰던 홍준표 한국당 대표, 바른미래당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와 유승민 대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등에 대한 야권 지지자의 피로감은 큰 상황이다. 승패에 따라 김태호 후보가 50대 기수론을 앞세워 신보수의 아이콘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포스트 홍준표’ 체제를 꿰차기 위해 몸풀기에 들어간 친박(친박근혜)계 정우택, 비박(비박근혜)계 김무성·나경원·심재철 의원 등과의 전략적 제휴 여부도 보수 권력구도의 핵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MB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김태호 후보는 박근혜 정부 땐 친박계로 통했다.
하지만 5월 말 김태호 후보의 상황은 ‘흐림’이다. 한국당 핵심 관계자는 “현재 당선권인 곳은 TK 두 곳과 울산, 그리고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경남보다는 충남”이라고 말했다. 선거 초반 타 지역 대비 박빙 구도였던 경남지역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격차가 벌어진 점도 부담이다. 한국당 내부에선 지방선거 패배를 기정사실로 하고 당 중진급의 물밑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
김태호 후보 측이 기대하는 것은 ▲샤이 보수(여론조사에서 응답하지 않는 보수층) ▲5060세대의 높은 투표율 ▲드루킹 파문 등이다. 현 여론조사는 모든 세대별 응답자의 ‘100% 투표’를 가정한 결과다. 2030세대의 투표율이 낮고 5060세대의 투표율이 높다면, 실제 개표 결과는 여론조사와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드루킹 변수는 선거 막판까지 폭탄 돌리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태호 후보는 드루킹 사건을 소설로 치부하는 김경수 후보를 향해 “워터게이트 결말을 보라”며 “드루킹이 선거판을 뒤흔들 것”이라고 연일 판 키우기에 나섰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PK 지역에 샤이 보수에 따른 여론조사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며 “경남지사 선거는 샤이 보수와 세대별 투표율, 외교·안보 이슈, 드루킹 사건 등이 당락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평론가는 “김태호 후보로선 지더라도 21대 총선 때 원내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김태호 대안론은 차기 총선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추격전 결말은 보름 남짓 남았다.
윤지상 언론인
‘대권 정거장’ 역대 경남지사들 운명은? 대권열차 타긴 탔지만… 역대 경남지사는 수도권 못지않은 대권의 정거장으로 통했다. 하지만 종착역에선 그 누구도 하차하지 못했다. 일부는 ‘영남 지역주의’ 프레임에 걸렸고 또 일부는 지나친 ‘대권 욕심’으로 미끄러졌다. 1995년 민선 1기 지방선거부터 현재까지 경남지사는 총 4명이 배출됐다. 제29∼31대는 김혁규 전 지사, 32∼33대는 김태호 자유한국당 경남지사 후보, 34대는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 35∼36대는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각각 지냈다. 민선 1기인 김혁규 전 지사는 9급 공무원의 신화다. 창녕군청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한 김 전 지사는 6년 만에 미국행을 택했다. 제조업에서 사업기반을 일군 김 전 지사는 5공화국 시절 민주화추진협의회 뉴욕연구소를 설립,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연을 맺었다. 미국 사업에 성공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 것과 비슷했다. 김 전 지사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귀국해 YS의 외곽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의 총괄기획실장을 맡았다. 정권교체 이후 경남지사만 내리 3선을 했다. 승승장구하던 김 전 지사는 참여정부 1년차 말인 2003년 12월 한나라당을 전격 탈당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특보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04년 17대 총선 때 비례대표 4번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김 전 지사는 개각 때마다 차기 국무총리 1순위로 거론됐지만, 막판 낙점을 받지 못했다. 그는 2007년 ‘영남 후보론’을 고리로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권 발 정계개편인 대통합민주신당 합류를 거부하고 의원직마저 사퇴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김태호 후보는 경남도의원, 거창군수, 경남지사 재선 등을 거친 보수진영 내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이명박(MB) 정부 때인 2010년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낙점됐다. 당시 48세에 불과하던 김 후보는 단번에 보수진영의 세대교체 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에 휩싸였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거짓해명 논란까지 겹치면서 자진 사퇴했다. 김두관 의원은 대권 욕심이 화를 부른 경우다. 그는 참여정부 때 행정자치부 장관에 오르면서 ‘정권 황태자’로 불렸다. 2010년 6·2 지방선거 때에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에 나섰다. 원조 친노(친노무현)였지만, 비노(비노무현) 구심점 역할을 하려다가 완패했다. 경남지사는 홍준표 대표에게 넘어갔다. 여권 내부에선 지금도 김 장관에 대한 성토가 적지 않다. 여권 한 관계자는 “김 의원이 때를 기다렸다면 지금 입지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대표는 경남지사직을 교두보 삼아 재기한 사례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권력 중심 밖에 있던 홍 대표는 2012년 12월 재보선을 통해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이후 재선, 대선 후보, 당 대표 등에 올랐지만 중도 외연은커녕 영남 지역주의에 갇히면서 지방선거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을 전망이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