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난 5월 21일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 방안이 철회되면서 현대차그룹은 16년 만에 추진하던 합병을 포기하는 상황을 다시 겪었다. 그룹 측은 새로운 개편안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합병을 철회했지만 지배구조 개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에 백기를 든 모양새도 부담스럽다. 마침 구광모 LG그룹 상무가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지분을 상속세를 모두 내고 물려받았다. 세간의 눈이 따갑다. 현대차그룹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16년 전으로 시계를 다시 돌려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본텍과 합병은 좌절됐지만 이후 현대차그룹은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엠코를 통해 정 부회장의 자산을 엄청나게 불릴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현대글로비스 본사 전경. 고성준 기자
#12년 전 본텍의 추억
본텍은 옛 기아전자가 이름을 바꾼 회사다. 자동차용 오디오와 전자통제장치(ECU) 등을 생산해 현대·기아차에 납품했다. 2002년 당시 기아차 39%, 정의선 전무 30%, 또 정 전무가 60% 지분을 가진 비상장사인 한국로지텍이 지분 30%를 갖고 있었다. 정 전무는 2001년 유상증자에 15억 원을 투자해 30%의 지분을 확보했다.
16년 전에도 현대모비스는 차량용 오디오·비디오, 내비게이션 및 텔레매틱스 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카트로닉스연구소를 설립하고 일본 알파인사와 제휴하는 등 연구개발(R&D) 체제를 갖춘 만큼 생산기반 확보 차원에서 본텍과 합병을 추진한다고 주장했다. 이번과 거의 흡사하다.
2002년 당시 본텍과 현대모비스의 합병비율은 3.5 대 1이었다. 이 경우 정 전무는 본텍 주식 30만 주를 현대모비스 주식 105만 주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비상장사인 본텍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 정 전무에게 특혜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제 정 전무가 본텍을 인수할 때의 주식가치와 합병 추진 논의가 공개된 후의 주식가치는 10배 넘게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합병이 이뤄졌더라도 정 전무가 갖게 될 현대모비스 지분율은 1% 미만에 불과했겠지만 결국 여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텍의 좌절(?)…글로비스·엠코의 성공(!)
교두보 확보에 실패한 정 전무는 이후 한국로지텍으로 눈을 돌린다. 한국로지텍은 2001년 2월 자본금 50억 원으로 설립된 물류회사다. 정몽구 회장이 30여 억 원(지분율 59.85%), 정의선 전무가 20여 억 원(40.15%)을 출자했다. 지금의 현대글로비스다.
현대글로비스와 함께 등장하는 또 다른 회사가 있다. 현대엠코다.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전이던 2002년만 해도 현대차그룹은 그룹 내 공사 등을 도맡을 건설회사로 엠코를 설립한다. 한국로지텍이 59.96%를, 기아차와 현대모비스가 각각 19.99%씩 출자했다. 2003년 글로비스로 이름을 바꾼 한국로지텍은 보유 중이던 엠코 지분 60% 가운데 35%를 정의선 전무(지분율 25.06%)와 정몽구 회장(10%)에게 넘긴다.
이후 현대글로비스와 엠코는 내부 일감을 바탕으로 급성장한다. 현대글로비스는 2005년 상장하면서 정 전무의 가장 든든한 후계구도 자산이 된다. 지분율은 정 회장이 6.72%, 정 부회장이 23.29%다. 현대엠코는 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한 후 그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한다. 아직 비상장으로, 정 회장이 4.68%, 정 부회장이 11.72%, 현대글로비스가 11.67%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현대모비스 분할합병 좌절은…평행이론(?)
현대모비스의 국내 A/S 부품 부문을 떼어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시키는 방안이 좌절된 데는 합병비율이 문제가 됐다. 현대모비스는 상장사지만 그 사업부문을 떼어내 가치를 산정할 경우에는 ‘시장가’가 아닌 ‘감정가’가 될 수밖에 없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전에 삼성에버랜드를 상장한 것은 가치 논란을 없애려는 포석이었다”며 “삼성물산은 상장사 간 합병임에도 논란이 컸는데, 하물며 비상장 사업부문과 총수 일가가 최대주주인 회사의 합병가치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제기되지 않기는 어렵다”고 꼬집었다.
정 회장이 고령인 점, 현 정부의 순환출자 해소 압력이 높은 점 등을 감안하면 현대차그룹이 전혀 새로운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기는 너무 촉박하다. 이번 개편안 구조를 최대한 살리는 방안이 유력하다. 그렇다고 분할사업부문 가치 산정만 높여서 수정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정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가 희석되는 것은 물론, 이번 추진안의 흠결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을 전제로 분할사업부문만 별도로 상장하는 방안도 번거롭고, 명분도 애매하다. 결국 기아차와 현대제철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16.88%와 5.66%를 정 회장 부자가 인수해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가능성 급부상
기아차와 현대제철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22.54%의 시가는 5조 2439억 원이다. 경영권에 꼭 필요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제외한 정 회장 보유 상장 주식은 현대제철과 현대차, 현대글로비스를 합쳐 3조 원이 조금 안 된다. 그나마도 팔기 어려운 현대차를 제외하면 1조 5000억 원대다.
정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차 기아차 지분가치는 2조 2000억 원이다. 예전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이노션 지분 매각대금 8800억 원을 더하면 3조 원가량이다. 역시 핵심 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 현대차를 제외하면 2조 3000억 원가량으로 줄어든다. 현대차를 제외한 정 회장 부자의 상장사 지분 가치는 3조 8000억 원가량인 셈이다. 여기서 양도소득세를 제외하면 3조 원이 조금 넘는 규모다.
결국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가능성이 부상할 전망이다. 현재 현대엔지니어링의 장외주식 가격은 주당 77만 5000원 선이다. 정 회장의 보유지분 가치는 2700억 원, 정 부회장의 보유지분 가치는 8900억 원가량이다. 현대건설과 합병 가능성은 크지 않다. 또 다시 합병비율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장 시 주가 상승을 감안하면 양도세를 제외하더라도 최소 1조 원이 넘는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정 회자 부자가 상장주식으로 4조 원 넘는 자금을 동원한다면, 나머지 1조 원가량은 차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다. 기존 주주가치 훼손도 없고, 1조 원가량의 세금도 내게 된다.
#현대글로비스 전면에 나설 수도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외에 현대글로비스가 기아차와 현대제철이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을 인수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그룹 지주사 역할을 현대모비스에서 현대글로비스로 바꾸는 방법이다. 기아차와 현대제철만 세금을 부담하면 된다. 총수일가의 세금 부담은 거의 없다.
현대글로비스 주주 가운데 계열사는 현대차뿐이며 지분율(4.88%)도 미미하다. 순환출자 해소가 쉽다. 자금력도 충분하다. 올 1분기 말 현금성자산(현금, 기타유동금융자산)만 7조 3000억 원에 달한다.
정 회장 부자가 보유중인 계열사 지분을 현대글로비스에 현물출자하면 지분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논란을 피하려면 현대엔지니어링을 상장시키는 것이 깔끔하다. 현실화될 경우 정의선-현대글로비스-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의 지배구조가 이뤄진다.
이 경우에도 변수는 있다. 총수지분율 상승에 따른 일감몰아주기 규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위험이 따른다. 그렇다고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해 떼어낼 경우 자산 가운데 계열사 지분이 절반을 넘어 지주사로 강제전환될 우려도 있다. 지주사로 강제전환되면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등 금융계열사의 비금융계열사의 출자지분을 해소해야 한다. 경영권을 잃지 않으려면 총수 일가가 금융사 최대주주가 돼야 한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