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승강기가 고장나도 그걸 고칠 줄 아는 기술자가 없었다. 그에 비해 당시의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이자 기술선진국이기도 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몇몇 내로라하는 건물은 필리핀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곤 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필리핀이 지금은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아시아에서 가정부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르코스의 1인 장기독재에다 몇몇 패밀리가 독과점하고 있는 부(富)의 편재 등을 혁파하지 못한 채 나라를 이끌어 온 것이 발전을 발목잡고 국력의 쇠퇴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불과 50년 전만 해도 승강기 수리할 기술자가 없어 필리핀에서 기술자를 불러와야 했던 우리는 이제 세계적인 IT강국으로 발돋움했고 연간수출 2천5백억달러를 돌파한 12대 경제강국으로 떠올랐다.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와 수출 1백억달러가 전 국민적 염원이었던 70년대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전 국민이 땀 흘려 이룩한 성취였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세계 제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계 5대부국의 하나였던 남미 아르헨티나는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까지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잇단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군부의 장기집권이 가져온 업보였다.
우리도 이제는 연간 수출고 2천5백억달러의 성취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10년째 1만달러선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며 기업인들은 회사 꾸려나가기가 IMF 때보다도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매 분기마다 발표하던 경제전망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워낙 불확실해서 전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IMF 때도 그럭저럭 견디어냈던 `먹는 장사’도 불황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올해 들어 문을 닫은 음식점이 45만 개나 되었다. 경기는 안개속을 헤매고 실업률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도 정치권은 말로만 민생을 들먹일 뿐 눈만 마주치면 정쟁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예부터 수성(守成)은 창업(創業)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1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경제를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경제도 멀지 않아 남미의 전철(前轍)을 밟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수출 2천5백억달러에 드리운 깊은 그늘을 걷어내는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