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여전히 세상은 시끄럽고 어지러운데 그런 세상에 구주가 오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을 닮아 여전히 시끄럽고 어지러운 내 마음에 ‘평화의 구주’는 가당키나 한 것인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웅장한 성가대의 찬송가는 아름답기만 한데 그 찬송에 공명하지 못하는 영혼은 겉돌 수밖에 없다. 왜 ‘나’는 이미 오신 구주를 보지 못하는가? 왜 내재하는 구주를 느끼지 못하는가?
내 속의 내가 너무 많다. 내 속의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 당신의 쉴 곳이 없으니 내 쉴 곳도 없다. 지나놓고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을 욕심부리며 미워하며 스스로 갈등이 되고 분노가 되어 버려야 할 것들을 보물처럼 꾸역꾸역 안고 살았다.
정리하고 나면 깨끗해지고 버리고 나면 홀가분해 지는데 버리기 힘든 격정이나 욕심 혹은 억울하다는 느낌! 그런 것들이 차 올라 헉헉거릴 때가 있다. 영혼의 목욕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예수는 얼마나 선명한 인물인가. 알다시피 예수는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십자가만큼 기막힌 일이 있을까? 그 억울한 십자가에서 “억울하다” 호소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십자가를 짊어지기만 한 예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를 생각하면 보이는 세상이 전부일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인생은 함정이 많은 지뢰밭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가장 큰 함정일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크게 되는 것보다는 ‘나’를 바로 보는 게 가장 큰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나’를 바로 보기 위해 출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월정사에 1개월간 단기출가 학교가 생긴 모양이다. <출가>라는 다큐 프로는 1개월간 수행하는 단기출가 학교를 따라갔다. 이 시대, 누가 왜 출가를 꿈꿀까? 다큐 <출가>는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먼저 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드러난 이들이 아니지만, 왜 사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찰자의 측면에서는 선구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달간이라고는 하지만 삼보일배에서 용맹정진, 삼천배까지 수행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는데 그럴수록 경험이 깊어진 인상이었다. 70세 노인은 유언장의 한 줄을 얻었다고 하고, 20대 청년은 입버릇이었던 “짜증난다”는 말을 잊었다고 한다. 내 마음에는 아직도 일주문 근처를 서성거린다는 30대 남자의 말이 오래 남았다. 그는 절도 사회일 수 있는 것처럼 사회도 절일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온 천지가 지옥일 수도 있고 수행처일 수도 있다는 뜻일텐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해 스님의 <서장(書狀)>에는 조용한 곳에서 힘을 얻는 이유를 시끄러운 곳에서 힘을 쓰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지럽고 멀미나는 산란한 세상이라고 화두를 놓치고 ‘나’를 놓치는 건 세상이 시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수행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구주를 만나고 ‘나’를 만나야 한다는 뜻일텐데, 예수에게 묻고 싶다. 억울한 십자가를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걸어간 당신의 뜻은 무엇인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