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그렇게 낙천적이고 그렇게 합리적인 은사 한 분이 폐암 진단을 받았다. 퇴직하시면 오랫동안 인연이 있었던 바닷가 오두막집으로 내려가실 거라고 하셨는데…. 서울에선 아침해가 매혹적이지 않아 야행성으로 살아오셨는데, 섬의 오두막에서는 아침해가 뜨는 풍경이 설레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된다고 하셨다. 감기인 줄 알고 한 달 정도 감기약을 먹었는데 낫지를 않아 큰 병원에 가니 폐암 4기라고 하더란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선생님이?! 충격이었다.
생의 중요한 일은 그렇게 갑자기 와서 뒤통수를 친다. 뒤통수를 맞고 허둥대고 당황하고 억울해할 때일 텐데 선생님은 차분하다. 그리고는 말하신다. “갑자기 뒤통수를 친 그 사건은 ‘갑자기’가 아닐 거야. 오래된 친구 같은 담배, 그게 삶일 거야, 했던 스트레스….”
울컥, 슬픔이 몰려온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얼마나 자정의 한도를 넘는 독들을 마시며 살고 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으로 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독들을 내뿜을 수 있는 건지. “너무 바쁘게 살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독들은 토해내며 살아라. 그게 자기를 사랑하는 걸 거다.”
선생님을 알고 지낸 20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80년대 그 어려웠던 대학생활 내내 언제나 우리편이었던 선생님, 졸업을 하고도 일년에 한 두 차례 찾아갈 때면 아, 신뢰란 게 저런 힘이 있구나, 를 느끼게끔 여전히 우리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셨던 선생님….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다고 한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성공해봤자 별 거 없더라,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꽃이 피고 지고, 그런 것들에 반응하면서 흙을 밟고 사는 게 좋은 인생인 거야.”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대학가기 위해, 대학에서는 취직하기 위해, 취직해서는 승진하기 위해, 승진해서는 구조조정 당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충직한 노예로서 생에 쩔쩔매며 성실하게만 살아온 우리는 제대로 ‘지금, 여기’를 살아본 적이 없다. 조금만 참으면 ‘앞으로 거기’에 행복이 가득 빛처럼 쏟아지는 분홍빛 고운 꿈나라가 있을 거라고, ‘지금, 여기’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얼마나 많은 독을 들여 마시며 살아온 건지. 그렇게 ‘지금, 여기’를 살아본 적이 없으니 영원히 ‘지금, 여기’를 살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를 경험하는 초보적인 방법은 걷는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쯤 몸을 가볍게 하고 걷다보면 마음도 가벼워진다. 무척이나 바빴지만 정신은 없었던 기자 생활을 마감하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사안을 거쳐 신비의 실크로드 1만2천km를 걸은 올리비에는 그 고행 같은 걷기를 ‘산책’이라고 한다. 고통스런 순례의 길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순간순간 찾아드는 생의 충만함 때문이었으리라.
얼마 전에 나는 해남땅을 걸었다. 두륜산을 걸었고 땅끝마을을 걸었다. 그리고 거기, 땅끝마을에서 본 고은 시인의 시 자락은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있다. “땅끝까지 왔습니다. 지나온 세월도 함께 왔습니다. 저녁 파도 소리에 동백꽃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