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2차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뒤 통일각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청와대
5월 24일 밤 청와대로 모여든 청와대 관계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정상회담 취소 방침을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같은 날 오후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까닭에 그 충격은 더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회의를 긴급 소집해 대책을 논의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행동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통’으로 알려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조차 5월 21일 방미 길에서 기자들에게 “(북미정상회담은) 지금 99.9% 성사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청와대는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의 트위터를 보고 회담 취소를 인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측은 조윤제 미국 대사에게 회담 취소 사실을 발표 직전 통보하긴 했지만 보고 단계와 시차 등을 감안하면 형식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한-미 양국 핫라인은 가동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뿐 아니라 한국 측에도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 노림수는 무엇이었을까. 미국 현지 언론들은 북한이 협상 초반과 다른 태도를 보였고, 그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의심을 트럼프가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5월 22일 자신의 트위터에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과 두 번째 만난 뒤로 태도가 변한 것 같다”며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했다. 같은 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한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협상이 실패할 경우 북한은 리비아 같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미국 당국의 기류를 반영했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4일 나온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담화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최선희 부상은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며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날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담화 후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취소를 전격 통보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협상 기술이 발휘됐다는 반응도 줄을 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 무대에서 이뤄지는 협상을 일종의 ‘게임’ ‘거래’로 본다고 한다. 정상회담 취소 통보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가 게임을 하는 것이잖아요. 알죠?”라고 말했다. 5월 22일엔 “시진핑 주석은 세계 최고 수준의 ‘포커 플레이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분야에선 나도 못지않을 것”이라며 이번 협상을 포커 게임에 비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도 “판이 깨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이기는 협상을 위해선 도박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기술한 바 있다.
트럼프의 초강수에 북한은 황급히 꼬리를 내렸다. 서한이 공개된 지 9시간 만에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은 김정은 위원장 위임 담화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 상봉을 위해 노력한 데 내심 높이 평가해왔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북한이 상대방의 공세에 이처럼 빠른 시간에 저자세를 보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따뜻하고 생산적”이라고 환영했다. 또 “북한과 대화 논의를 진행 중이다. 6월 12일 (예정대로)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고도 했다. 정상회담을 둘러싼 북미 간 힘겨루기에서 미국이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은 “미친 사람을 다루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라면, 그건 그(김정은)가 처리할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었다. 본인이 김정은보다 더 미쳤다는 농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김정은과의 협상에 어떻게 임할지를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이 ‘벼랑 끝 전술’로 나오자 ‘회담 취소’라는 카드로 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바꾸게 되면 부디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거나 편지해 달라”며 여지를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뉴욕타임스도 “한 번은 시도할 가치가 있는 용기 있고 혁신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대북 전문가들은 정상회담과 북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확실한 주도권을 쥐었다고 평가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양국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사이 또 다시 초대형 깜짝 뉴스가 전해졌다. 5월 26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2차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이날 회담은 대부분의 청와대 수석들조차 사전에 몰랐을 정도로 은밀히 추진됐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과 청와대 경호실·부속실 일부 인사들만 알고 있었다”고 귀띔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정상회담 성사가 여전히 불투명한 가운데 이뤄진 까닭에 그 배경과 결과에 전세계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날 회담이 김정은 위원장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을 통해 담화를 발표하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회담에 대한 의지를 밝히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미 양측이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오해를 불식시키고 정상회담에서 합의해야 할 의제에 대해 실무협상을 통해 충분한 사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김 위원장도 이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5월 26일 “우리는 6월 12일 싱가포르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며 “그것(6월12일 북미정상회담 개최)는 변하지 않았고, 회담 논의가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자신의 트위터에도 “정상회담을 한다면 (예정일과) 같은 날짜인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것 같다”고 했다.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과 함께 2차 남북 정상회담 결과가 맞물리면서 사실상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성사 단계에 도달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