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전 중국 공산당 총 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장례식을 보도한 국내신문 기사의 한 구절이다. 다행히 몇몇 신문에서는 인명이나 지명에 한자를 병기하고 있어서 누구의 장례식이 어디서 열렸는지 알 수 있지만 괄호 속의 한자를 빼고 나면 로제타석의 고대문자를 판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베이징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명이지만, 바오바오산(八寶山)이나 자칭린(賈慶林), 허궈창(賀國强), 톈지윈(田紀雲) 등은 괄호 안의 한자가 없으면 바오바오산이 무엇이고 자칭린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연변일대의 지명도 모조리 현지발음으로 표기하는 바람에 낯선 땅 이름이 되었다.
조선족 자치구인 연변부터가 옌볜으로 발음할 뿐 아니라 이미 우리 입에 익은 송화강은 쑹화강으로, 도문은 투먼으로, 요동은 랴오뚱으로, 연길은 옌지로 쓰고 또 그렇게 발음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지명이나 인명표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한자권(일본·중국) 외국의 지명이나 이름은 원음을 적고 한 차례에 한하여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우리의 외래어 표기준칙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우리가 이토록 충실하게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데 비해 중국인들은 아직도 우리의 지명을 그들 나름의 표기로 고집하고 있다. 서울을 아직도 한성(漢城)으로 쓰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보니 중국에서 서울대학교로 보낸 우편물이 한성대학교로 가기도 하고 한성대학교로 보낸 우편물이 서울대학교로 가는 사태까지 생겨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지명이나 인명은 꼬박 꼬박 현지발음과 비슷한 한자어로 쓰면서 한국 지명만은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은 어차피 같은 한자를 쓰고 있으니 자기네들 편리한 대로 쓰고 발음해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일까.
얼마 전 서울시는 서울을 한성으로 쓰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중국발음으로 서울과 비슷한 `서우얼(首爾)’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 중국측에 통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오랫동안 한성을 써 왔다, 표기법 변경에는 시간이 걸린다, 지도와 정부관련 문서를 한꺼번에 바꾸기가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아예 “중화 5천년 전통의 역사를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만든 단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노골적인 반대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중화 5천년 전통’ 운운하는 것에서 우리는 또 한번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중화사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일이 이쯤되면 앞으로는 제발 서울을 `서우얼(首爾)’로 써주십사 하고 서울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친절하게 만들어 올린 우리 체면만 우습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중국발음에 가까운 서울명칭을 새로 만들어 중국에 매달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또 한번 사대주의 잔재를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