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가정에서 한계가 있는 사회화 교육, 인성교육을 위해 학교에 간 아이들이 ‘인성’이 무슨 뒤통수치는 말이냐며 오로지 “입시”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느라 지치고 지친다. 새벽에서 밤까지 공부!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무더기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교육은 어쩌면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인권탄압의 현장인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감수성은 얼마나 예민하고 에너지는 또 얼마나 충만한 나이인가. 그 젊디젊은 나이에 공부만 하라고, 공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협박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공부도 못하고 공부하기도 싫은데 공부만 하라는 그 지옥에서 공부가 싫은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더구나 빌딩 숲에서 자란 도시의 아이들은 자연의 위로로부터 멀고, 핵가족시대의 아이들은 할머니, 삼촌, 고모, 이모의 위로를 모른다. 그 아이들이 아는 것은 배우들의 사생활이고 그 아이들에게 가까운 것이 명품으로 둘둘 감은 탤런트들이 나오는 TV나, 성적인 욕망을 팔아먹고 사는 사이트들이 무방비로 노출된 인터넷이라면?
시끌시끌한 밤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선생이 있었다. 미즈타니 선생이다. 시끌시끌한 거리답게 선생은 마약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기도 하고 조폭 사무실에서 손가락을 잘리기도 했다. 그래도 선생은 다시 그 거리로 나선다. 그 곳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충만한 아이들, 그러나 그만큼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원조교제도 하고, 폭주족이 되기도 하고, 길 가는 사람을 협박하기도 한다. 도시의 밤은 길을 잃은 아이들의 살벌한 무대다. 그 살벌한 무대에서 황폐하고 막막해진 아이들이 선생을 만나 마음을 열기까지의 이야기가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다.
아이들이 선생에게 지난 세월을 고백한다.
“저 도둑질 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 했어요.”
“괜찮아.”
“저 학교에도 안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는 그 넉넉한 마음은 창이 되어 아이들의 마음을 연다. 마음을 연 아이들은 더 이상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무표정하고 엄숙한 얼굴로 공부만 하라고 다그친 어른은 아니었는지. 학교가 폭력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싫어 우리 학교에는 폭력이 없다고 학교폭력문제를 꺼내지도 못하게 한 교장선생님은 아니었는지. 어른들을 닮아 이기적이고 영악해진 아이들이 싫어 교사라는 천직을 대충대충 월급받는 직업으로만 생각한 선생님은 아니었는지. 내 아이 왕따만을 두려워해 왕따시키는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쫓아낼 궁리만 한 학부모는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