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이 시점에서 문제는 누가 대권경쟁에서 성공했는가가 아니다. 병역 의혹이 대선에 얼마나 큰 변수였는가를 밝히는 일도 아니다. 이번 사안을 보며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떻게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대국민 사기극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한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없도록 하는가이다. 이번 판결로 마무리된 병풍사태는 한국사회의 공론구조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군사정부시대 공작정치가 얼굴을 바꿔 다시 등장한 느낌도 든다.
먼저 병역 의혹의 제기와 확산 과정을 보자. 첫 보도는 2002년 5월 21일 주간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제목은 “병역면제 은폐 병무청 간부와 대책회의”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 대부분 신문은 <오마이뉴스>를 인용해 이 사실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방송 매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요 언론사들은 <오마이뉴스> 기사가 사실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한나라당 당직자의 반론도 게재하며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병역 의혹은 전국민적 관심사로 커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혹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나 실명의 증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익명의 관계자들이 제기하는 주장과 추정들이 기사의 근거였다.
두 달쯤 지나자 이번에는 김대업이라는 사람이 7월3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이 병역 의혹을 입증할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실명의 증인이 물적 증거를 갖고 등장한 것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사가 김대업의 기자회견을 크게 보도했다. 이는 의혹이 사실로 굳어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회견이었다. 한나라당에서는 증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의 취재관행에서 그러한 주장은 기사의 끝부분에 책임회피용으로 넣어두면 되는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결과는 김대업이라는 사람을 둘러싼 세력이 주도한 여론조작극의 대성공으로 귀결됐다. 이 기획의 최대 피해자는 거짓된 정보를 사실로 인식했던 전국민이다. 한국의 모든 언론사는 이들의 여론조작 기획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정치이벤트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기자들과 언론사들이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의 여론조작 시도는 여야를 막론하고 그 뒤로도 계속돼왔다. 국회의사당에서도 무책임한 폭로 전략을 구사했고, 최근에는 정부기관의 장관과 차관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미국 CBS 방송의 앵커 댄 래더는 대선기간 중 조작된 자료를 사실로 알고 보도했다 20년 앵커 자리를 물러났다. 담당 프로듀서가 회사를 떠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대법원 판단의 직접적 대상은 <오마이뉴스>와 김대업 등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언론 전체의 병풍보도가 심각하게 잘못됐음을 지적하는 판결이기도 하다. 판결 이후 주류 언론들은 김대업 등 이벤트 기획자들을 비판하는데 그쳤다. 자신들의 사실 검증 책임을 고백하는 언론사는 찾기가 어려웠다. 언론이 이처럼 손쉽게 여론조작극에 놀아나는 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