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나 초단은 이 글에서 “2009년 6월 5일 김성룡 9단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같이 오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다가 술을 많이 마셨고, 그의 권유대로 그의 집에서 잠을 잤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신을 차려보니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그 놈이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가 나를 강간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는 눈을 뜬 것이다”라고 적었다.
사건이 공개된 후 청정지역이라 여겨졌던 바둑계에서, 그것도 외국인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모든 언론이 들썩거렸지만 그때뿐. 여느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히기 시작했다.
한국기원은 ‘성폭행’을 폭로하는 미투글이 오른 후 윤리위원회와 실무조사단을 꾸려 진상 파악에 나선다고 했지만, 50일이 지나도록 가해자로 지목된 김성룡 9단에게 ‘기사 활동 임시정지’를 내렸을 뿐 후속조치에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여 바둑팬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4월 8일 서울 성동구청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프로기사회 임시 기사총회 전경. 김성룡 9단 제명안을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 175, 반대 17, 기권 12표로 제명안이 통과됐으나 이어 열린 한국기원 운영위원회는 ‘기사 활동 임시정지’ 처분이라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기원과의 행보와는 반대로 바둑 관련 단체들은 줄을 이어 디아나 초단의 용기 있는 고백을 응원하고 나섰다. 한국기원 소속 여자 프로기사 51명이 피해자 디아나 초단을 지지하고 조속한 해결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기사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김성룡 9단에 대한 제명안 투표를 실시해 찬성 175표, 반대 17표로 김성룡의 제명을 통과시켰다.
또 디아나의 모교인 명지대 바둑학과 동문 250여 명은 “날이 갈수록 가중될 디아나의 고통을 지켜만 볼 수 없어 나섰다. 이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배들이 살아가야 할 바둑계 전체의 일”이라며 디아나 지지를 선언했다. 바둑명문 충암고도 “도움 청할 곳이 없었을 디아나와 연대하며 프로바둑계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학교장 명의로 발표했다. 이밖에 바둑고등학교 학생들도 동참했다.
뿐만 아니다. 페이스북에서는 ‘디아나 사범님과 함께하는 사람들(With you, Master Diana)‘이라는 공개 그룹이 결성됐다. 348명이 공감 중인 이 그룹엔 프로기사, 교수, 바둑 관계자, 기자 등 다양한 바둑 종사자들이 디아나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재일기사 류시훈 9단은 이 게시판에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당사자에게는 한 달 남짓한 이 시간이 10년 이상의 시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이번 사태에서 한국기원이 보여준 태도는 바둑팬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소속 기사가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바둑팬들에게 신속히 사과했어야 했다. 그저 ‘임시정지’라는 시간연장책만 쓰면서 지금까지도 팬들과 당사자 디아나 양에게 공식적인 사과가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한국기원이 끝까지 진심어린 사과와 상식적인 징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사태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그룹의 남치형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도 “한국기원이 윤리위를 조직하고 조사에 착수한 것이 4월 17일이니 벌써 40일이 지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중간발표 한번 하지 못하고 윤리위원의 면면은 왜 여전히 비밀이며 언제 어떤 절차와 회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겠다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숨어서 속닥거리는 김성룡과 공정한 절차를 약속하고도 절차를 공개하지 않는 한국기원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고 성토했다.
현재 한국기원은 ‘기사활동 임시정지’ 처분이 내려진 김성룡 9단은 윤리위원회의 조사 후 조사 결과에 따라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며, 징계위원회에서는 징계 여부와 수위를 결정한다고 밝힌 상태다. 당초 5월 안으로 결과를 발표한다고 알려졌으나 5월 말 현재 공식 발표가 나오지 않고 있다.
디아나 초단과 외국인 바둑도장 ‘BIBA’를 운영하고 있는 김승준 9단은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건 초기 자세한 진술서를 요구했던 한국기원은 이젠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이 맞지 않는다며 추가 질문이라는 명목 아래 디아나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김성룡의 행적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분야에서도 미투 사건이 이런 식으로 전개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에 디아나는 한국기원 측에 근거도 불분명한 윤리위원회를 통해 계속 괴롭힐 것이 아니라 속히 운영위원회를 열어 김성룡에 대한 징계를 내려줄 것을 촉구하고 있는 상태”라고 전하면서 “상식에 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편 (사)여성바둑연맹도 최근 한국기원 운영위원회의 징계가 미흡하거나 기존 입장과 큰 변화가 없다면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