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 ||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일을 보며 갖게 된 생각이다. 가장 섬뜩했던 경우는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상습투기자 5만 명을 끝까지 추적해 벌하겠다는 이해찬 총리의 다짐이다. 처음 헤드라인을 접하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했다. 1970년대 긴급조치들이 차례로 공포되던 상황이 연상됐다. 물론 지나친 상상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70년대식 폭정이 되풀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믿는다. 긴급조치 시대는 갔다. 그 시대의 체제유지 하부구조도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때와 혹시 닮은꼴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구지 못한다.
뉴스 화면을 보며 저건 아닌데 하던 상황 또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편집·보도국장단의 만남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서울대학의 논술시험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 간담회에 초청된 국장은 모두 31명이었고, 참석한 사람은 29명이었다. 모임의 취지는 대통령과 뉴스의 야전사령관인 편집·보도국장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1:29의 대화는 허심탄회하기 어렵다. 그 자리에서 발언의 기회를 가졌던 국장은 10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발언 내용도 대부분 정국현안들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묻는 것들이었다.
이 간담회가 불편한 이유는 그 형식에 담겨있는 권위주의 때문이다. 대통령이 기자를 만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뉴딜정책으로 미국사회의 골격을 바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주말이나 저녁 시간에는 기자들과 비공식적인 만남을 수시로 주재하기도 했다. 기자들과의 만남이 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 언론사의 국장들을 30명씩이나 집합시켜 사진을 찍는 일은 루즈벨트식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다르다. 이러한 모임 형식은 개인적 친밀감을 강화할 수도, 효과적인 대화의 장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론사 국장단 간담회는 역시 70~80년대식 군사문화와 닮았다. 지난번 간담회 화면을 보며 권위적 대통령이 1년에 한두 차례 통치기구의 일부로 인식하던 언론사 국장들을 만나주던 80년대를 연상하는 일은 걱정 많은 학자의 기우이기를 희망한다.
5년 전쯤 원로 언론인들 10여 명과 심층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은 무엇인가가 조사내용이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요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통령의 언론관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사람의 핏속에 흐르는 권위적 사고방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앞에 언급한 총리의 발언과 대통령의 간담회는 이 두 가지 요인이 여전히 우리 정치현실을 일상적으로 지배한다는 느낌을 확인시켜 주었다. ‘참여’를 내세웠을 때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크게 전진시킬 수도 있다고 희망했다. 그러나 이 정부에는 커뮤니케이션이 기본적으로 설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다. 정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더욱 찾기가 어려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