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그 개는 독일의 북부지방이 고향이라 했다. 그럼 그렇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북부 유럽 추운 곳에 적응하여 잘 살던 개가 괜히 이 더운 여름 한반도에 와서 고생한다 싶었다. 어느 인간들이 저 개에게 고향을 빼앗아 견디기 힘든 더위에 헉헉거리게 했느냐고,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더위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가 안쓰러워 그 개를 보고 있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함께 간 친구가 시간을 지체하고 자꾸 그 개의 목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 얘, 피부병 생겼구나, 하면서 이제는 피부까지 쓸어준다. 자세히 보니 검은 털 사이로 진딧물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 피부병은 지옥 같은 더위를 견딜 수 없어 생긴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피부병을 확인한 후에는 조금이라도 그 자리에서 지체하기가 싫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옮으면 또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그러나 친구는 차분했다. 피부병이 무섭지 않은 듯, 자꾸만 쓸어주고 있었다. 내가 가자고 하니까 약을 사와야 한다고 했다. 생명 있는 것이 저렇게 아픈데 두고 갈 수 없다는 거였다. 너, 피부병 옮으면 어떡하려고?… 지금껏 그 친구는 피부병이 옮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 지 배려하는 능력이었다. 흔히들 성서의 사랑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상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것,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사랑일까… 사랑이 아니어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할 수 있다는 성서의 말은 오랫동안 내 화두였었다.
그것은 사랑은 자기만족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사랑에는 분명히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좋을 충족감이 있다. 그런데도 자기만족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사랑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 지 배려하는 능력에서 오기 때문일 것이었다.
개의 피부병을 발견하고 마치 자기 피부병처럼 쓸어주고 또 쓸어준 친구의 기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지난 여름, 나는 인간의 말로 그려낼 수 없는 깊고도 고요한 감동의 현장을 본 것이었다. 그것은 나보다 상대를 더 민감하게 느낄 줄 아는 신비한 능력, 사랑이었으므로. 그 친구야말로 그 자신이 자폐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흐르고 흐르는 생명이라는 것을, 머리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알고 있었던 거였다.
사랑은 너를 위한 거지만‘너’를 위하는 내가 더욱 깊이 느끼는 것이었다. 사랑을 하는 자는 다치지 않는다. 사랑이야말로 치유의 능력이므로.